2020 외국 베스트 영화 선정의 변
2020년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 가장 내 마음을 움직였던 영화는 <환상의 마로나>였다. 보통은 영화를 보며 드는 어떤 생각들이, 이전 글에 따르면 어떤 ‘가설’들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특정 장면과 딱 맞아떨어지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환상의 마로나>의 경우는 그냥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 리얼타임으로 마음이 움직여버렸다. 현재, 지금,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하려는 나의 손을 마로나가 자꾸 핥는다. 됐고 그냥 놀자고 한다. 그럼 놀 수밖에 없다. 이건 마로나라는 개의, 아니 어쩌면 모든 개의 삶의 방식과도 같으며, 이를 체험하게 해주는 감독의 무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가장 내 마음을 건드린 영화를 다섯 번째 순서에 올린 건, 아무래도 아직 내가 마로나의 태도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대신 지난번 장국영 글을 올렸던 하파스바자에서 [이대로 묻힐 순 없다! 당신이 놓친 2020년 개봉명작 8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리는데 나의 픽을 묻길래 <환상의 마로나>를 픽했다. 부족하지만 이걸로 마로나가 나를 조금은 이해해주기를.
<환상의 마로나>는 늘 우리의 곁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현재를 즐기는 개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화다. 애니메이션 작법을 활용하여 개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구현해낸 감독의 무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렇게 한 편의 견생(犬生)을 체험하고 나면, 중요한건 무엇을 놓쳤는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모인 하루하루가 ‘환상’적인 내년을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렇다고 다른 세 영화들이 <환상의 마로나>보다 마음을 덜 움직인 것도 아니다. 나머지 세 영화 중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1917>뿐인데, 나는 이 영화를 봤던 날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17>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다 약 8개월 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본 첫 영화였다. 오랜만에 보게 된 한글 자막 영화였던 만큼 더 집중이 잘 됐던 거 같다. 게다가 롱테이크는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한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들 중 원테이크 형식에 집착하느라 다른 것을 놓쳤다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니 사실은 동의하고 말고를 떠나서 내 기준에는 성립되지 않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CG를 사용한 영화를 두고 CG를 문제 삼는 듯한 느낌이다. CG나 원테이크 모두 취향이 아닐 수는 있으나, 그것이 비판받아야 될 지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테이크 또한 CG와 같은 표현을 위한 도구로 봐야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원/롱테이크는 홍상수나 지아장커가 사용하는 롱테이크와는 구분 지어야 하겠지만(그러나 그 구분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긴 하다).
아무튼 <1917>의 최고의 장면은 네이버 블로그에도 썼듯 한 일병이 전쟁을 막기 위해 돌격하는 병사들을 피하며 수직으로 달리는 장면이다. ‘횡단의 물결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종단의 움직임’이라고 표현했었는데, 내가 썼지만 정말 터무니없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장면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이렇게 소중하구나, 를 느끼게 해준 영화로, 이 당시가 코로나 초기였다는 게 정말 새삼 놀랍다.
<페인 앤 글로리>를 영화관에서 보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작년 맘에 안 차는 영화를 봤을 때마다 한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엔딩 장면을.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영화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그 엔딩을. 그것을 현실이 아닌 영화관에서 봤다면 어땠을까.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영화였을까. 현실 and 영화.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영광일까. 고통 and 영광. and는 A와 B가 동등한 것이라는 걸 설명하는 접속사일까. 아니면 A가 있어야 B가 있을 수 있다는 관계사일까. 양쪽 다 서로 정답이면서 동시에 둘 다 정답이 아닌,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글로써 매듭짓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영화를. 이렇게 또 쓸 필요가 없는 말들을 올해도 써버렸다.
<작가 미상>이 좋았던 것은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표현해버리고마는 한 예술가를 말이다. 어떤 작품을 작가의 이름을 떼놓고 보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예술가는 차라리 자신을 숨긴 채 작품을 만드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작가, 미상’이다. 솔직히 내가 이 영화를 잘 이해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미상인 작품’을 상상해보게 만든 이 영화를 못 본 체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또 못 본 체 할 수 없는 2020년의 영화들이 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정말 작가와 작품을 떼어놓는 것이 가능/불가능하다는 것을 떠나서,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배우들은 전부 서양 사람들인데 영화는 분명 일본인의 영화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나는 그레타 거윅을 미국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좋은 의미로.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정말 제멋대로 만든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그 어떤 영화보다 잘 설계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조조 래빗>의 감독인 타이카 와이티티가 상상 속 히틀러를 연기한 것은 정말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실망했던 켄 로치 감독을 다시 보게 만든 영화이다. <블루 아워>에서 분열됐던 두 소녀가 마침내 화해하는 장면은 올해 가장 마술 같은 장면이었다. 내 최애 감독 중 하나인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주식회사 스페셜액터스>도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게 다 액팅이었다니. 모두 다 액터/액트리스들이었다니.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혼자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뒤집어 한 줄 평을 지었다. ACTORS ARE SPECIAL. 그러고 보니 2020년도 정말 특별했다. 조금 늦었지만, 2020년 이제야 빠이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