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힘들 때 어떤 영화를 보나요?

힘들 때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by 김철홍

당신은 힘들 때 어떤 영화를 보나요?

저는 그럴 때는 영화 안 보는데요.

이건 나의 대답이 아닌 평론가 정성일의 대답이다.


아레나옴므플러스는 2021년 1월호 근하신년 특집 기사로 성악가 조수미, 영화감독 이준익, 가수 김창완 등에게 살면서 마주한 크고 작은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근데 특집 이름 이거 누가 지은 거냐. 참고로 각자의 대답 중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인 것은 조수미님과 김창완님의 대답이긴 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두 분의 글은 일단 희소하니까.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謹賀新年 근하신년 (smlounge.co.kr)


반면 정성일 평론가의 이번 글은 희소하지 않을뿐더러, 솔직히 내용도 그다지 나에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왜냐면 그는 힘들 때 영화 대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며, 글에 영화 대신 베토벤 교향곡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향곡 1번이 어떻고 2번이 어떻고. 4번은 어떤 버전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며, 어떤 건 한 번 듣고 질려서 더 이상 듣지 않는다고. 클래식에 아무 감흥이 없는 나는 아무 것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에게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준 것은 맞다. 힘들 때 영화를 보지 않는 행위에 대하여(‘하지 않는 것’을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직업이 ‘영화’인 그는, 힘들 때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했고, 그러면서 “영화를 볼 때 위로를 구하지 않”으며, “영화를 볼 때마다 긴장을 느낀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언젠가부터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잘 안 본다’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영화를 잘 봤다. 무턱대고 봤다는 뜻이다. 딱히 할 게 없을 때 영화를 봤고, 할 게 있어도 영화를 봤다. 정성일 평론가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영화와 나 사이에 긴장감이란 없었다. 아무 때나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연락했고, 그러면 만났다. 말하자면 머리도 안 감고 세수도 안하고 잠잘 때나 입는 츄리닝을 입고 영화를 만난 거다. 어쩌면 칸영화제에서 그토록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만 극장에 출입을 허락하는 전통을 고집하는 것도 이런 긴장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이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cgv를 갈 때 정장을 입고 간다는 것도 아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어떤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나는 몇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 영화를 보러 그 극장에 간다. 실은 나는 일산에 살아서 서울 웬만한 곳을 가도 2시간이 넘지 않기 때문에 방금 전 표현은 조금 과장 섞인 표현이긴 하다.


하지만 집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행위에 대해서는 예전에 비해 많이 머뭇거려진다. 영화 한 편이 내게 너무 무거워졌달까. 영화는 여전히 내게 재미를 주고,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때로는 영화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어떤 대단한 것을 봤을 땐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은 무조건 봐야한다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소문내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기도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영화와 나 사이에 생긴 이 긴장감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요즘 유행인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홈>을 보며, 나의 이런 변화가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가 시작된지 열흘째, 아홉 편의 영화를 봤다.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 <폭스 캐처>, <족벌 두 신문 이야기>, <나의 작은 동무>, <신의 은총으로>, <꽁치의 맛>, <운디네>, <차인표>, <작은 빛>. <운디네>와 <꽁치의 맛> 빼고는 전부 랩탑으로 봤는데,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도 영화 한 편 보기 어려워하는 나를 보고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그때 우연히 본 <스위트 홈>이 너무 잘 봐졌다. 한 시간에 달하는 영상을 한 번에 보는 데에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고,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해서 다음 화가 보고 싶어졌다. 여기서 방점은 ‘아무 생각 없이’다. <스위트 홈>이 잘 봐지는 이유는 <스위트 홈>이 나에게 아무 생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이 드라마가 빼앗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크리처들처럼, 이 드라마가 나에게 촉수를 꽂아 내 뇌 속에 있는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스위트 홈>을 보면서 유일하게 한 생각은 이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보다가 코피가 나면 웃기겠다..였는데 이 생각은 심지어 웃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위트 홈>을 보면서 역으로 안도했다. 영화를 보는 것이 망설여지는 건, 나쁘지만은 않은 일인 것이다. 영화를 보며 긴장하는 나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것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영화평론가’라고 한다면, 정말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힘들 때 영화를 안 본다고 했다. 근데 그건 그가 힘들 때 애써 영화를 피해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도 물론 힘들 때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실한건 힘들 때 ‘위로를 받고자’ 영화를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분명 누군가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건 꽤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그러니까 힘들 때 왜 영화를 보세요. 영화를 보는 것도 힘든 일인데,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영화를 보는 것으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면, 영화를 보며 힘듦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고 싶다. 당신도 힘들었나요. 저도 힘들었어요. 위로받고, 위로해주고 싶다. 영화를 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아야겠지만, 누구에게나 조금은 힘든 일이었으면 좋겠다. 다 찡찡댔으니, 이제 저는 이만 영화 보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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