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을 보고 할머니를 떠올리다

<소울>의 감동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by 김철홍

소울. 할머니인 것처럼.


<소울>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사후세계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전세계가 있다는 것. 그곳에서 뭔가 우리의 마음속에 불꽃을 심어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만 그 불꽃이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어찌 보면 너무도 착하디착한 메시지이지만 그래도 보는 순간 큰 위로가 느껴지긴 했다.


이건 분명 애니메이션의 힘이다. 애니메이션은 우리를 온전한 리스너로 만들어준다. 온전한 리스너라는 건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다는 말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순간 나는 아이가 된다. 아이가 되어 할머니가 해주는 얘기를 듣는 기분을 느낀다. 이때 할머니의 이야기는 절대적이다. 할머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우리는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개연성을 따지거나, 말도 안 된다며 (불)평하지 않는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할머니꺼 ‘영화’ 쓰레기야,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릴 적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야기에 개연성 같은 것은 ‘덜 중요한 것’이라는 걸 배우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중요한건 할머니의 의도였다는 것을 다 커버린 후 돌이켜 보며 깨닫는다. 할머니는 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걸까. 이렇게 과장함으로써,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간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손톱을 먹는 쥐가 있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귀신이 있다고 함으로써,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타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할머니의 이야기의 힘이다.


나는 애니메이션 영화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세계. 그 어떤 이야기도 말이 되는 세계. 아니 애초에 ‘이야기’ 중에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 있을까. 어떤 말도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인데, 어른이 된 우리는 가끔 그것을 잊는다. 내가 이 세계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며,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을 바보로 만들 때. 그 사람을 바보로 만든 사람의 세계는 얼마나 작은 세계인 것인가. <소울>을 보며 바보는 나였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그렇게 할머니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나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그 메시지를 생각해본다. 아니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소울>이 감동적인 이유는 여기에서 그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울>은 꿈이 있는 사람들과 꿈이 없는 사람들을 동시에 위로한다. 할머니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누운 아이들. 할머니 내 쪽으로 누워. 싫어 싫어 나를 보고 누워. 왼쪽의 아이는 꿈이 많은 아이이고, 오른쪽의 아이는 꿈이 없는 아이일 때, 할머니는 기어코 두 아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소울>은 일생일대의 무대에 오르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불꽃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울>은 마음속에 불꽃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게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울>의 메시지는 정신을 차린 뒤 되새겨보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결국은 그냥 살라는 거다. 포기하지 말아라. 그렇지만 그것을 못 이룬다하더라도 큰 상관이 없다. 인생은 그냥 현재에 충실하는 거다. 집착하지 마라. 이러한 조언을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면, 나는 그 이야기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런 얘기를 한다며 욕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할머니의 이야기라면,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이야기라면, 그 내용이 전혀 독창적이지 않아도, 그 내용이 아무리 진부한 것이라고 해도, 그 이야기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의도가 느껴지니까.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니까.


영화를 보며 22의 불꽃은 따뜻한 마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22는 조와 함께 조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 조의 단골 미용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22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아주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 그곳에 있던 모든 손님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듯 22의 이야기에 빠져 들고, 조의 친구 미용사는 22에게 너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는 얘기를 한다. 뿐만 아니라 22는 음악을 포기하러 온 조의 학생과도 완벽한 대화를 나눈다. 음악 그 쓸모 없는거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특유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는 22. 22와 대화를 마친 학생은 홀연히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이때 22가 말한 것들이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하디 평범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22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능력. 할머니처럼 이야기하는 능력. 최근 본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Pretend it’s a city)의 주인공 프랜 리보위츠 또한 그런 능력을 가진 할머니이다.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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