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이제그만끝낼까해를 끝낼까 해

by 김철홍


end.jpg


1.

이동진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씹고 뜯으며 의미의 퍼즐을 찾을 먹을거리가 무궁무진한 영화다. 영화보기의 재미를 여기에서 찾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보물창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보물창고는 아무래도 제이크의 어린 시절 침실(Jake’s childhood bedroom)이다. 이 방엔 영화에 등장하는 웬만한 레퍼런스들의 출처가 말 그대로 ‘비치’돼있다. 이 방에서 영화를 잠시 멈춘 뒤, 그곳에 있는 책과 그림과 영화가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추적해나가는 것은, 분명 누군가에게 나름의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2.

그런데 나는 그런 재미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보다 직관적인 재미를 주는 영화를 선호한다. 직관적 재미란 주로 시각적인 측면의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 또는 독특한 형식으로부터 느껴지는 어떤 지적인 측면으로부터 느끼는 재미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이크의 어린 시절 침실’로부터 퍼즐을 찾는 재미가 아닌 직관적인 지적 재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침실이 카우프만의 작업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3.

이에 따르면 이 침실은 제이크의 ‘뇌’이다. 마치 <인사이드 아웃>의 그것처럼. 더 정확히 표현하면 제이크가 어떤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를 관장하는 뇌의 어떤 부분. 이 침실은 그러니까 이 방에 있는 것들 때문에 현재의 제이크가 있다는 것, 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우프만이 ‘제이크의 침실’을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 인과가 뒤바뀐다. 카우프만이 제이크의 침실을 만들기 위해선 이미 존재하는 제이크를 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과를 뒤집어 나의 과거(기원)를 들여다보는 작업.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의 기억의 방을 기어코 창조해내어,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봐야 하겠다는 고집. 그것은 카우프만이 꾸준히 지켜왔던 자신의 ‘고집 방식’이며,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그 고집을 가장 제멋대로 실현해 낸,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4.

영화에서 ‘나의 뇌(방) 속에 들어가 보기’와 연결되는 또 다른 장치는 풍경화다. 젊은여자(제시 버클리; 이 캐릭터는 크레딧에도 young wom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와 제이크의 부모님은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젊은여자가 자신이 사람이 없는 풍경화를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자, 제이크의 아빠가 “그림 속에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보는 사람이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냐”고 묻는다. 여기서 풍경화를 영화, 화가를 감독, 으로 치환하면, 아빠의 말은 곧 영화 속에 자신을 넣은 채 자신을 바라보아야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말로 다가온다.


5.

아빠의 이 말이 카우프만의 말처럼 들리는 이유는, 영화 속에 자신을 넣는 것이 카우프만의 꾸준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각본을 쓴 2002년 작 <어댑테이션>에서 카우프만은 영화 속에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이라는 각본가 캐릭터를 그대로 등장시킨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촬영 현장으로부터 시작되는(실제 배우 존 말코비치까지 나온다) 이 영화에서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은 베스트셀러 소설 <난초 도둑>(이 또한 실제 존재하는 소설이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에 난처함을 겪다 좌절한다. 어디까지가 실제 있었던 일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정말로 구분하기 어려운 이 영화는 어떤 측면에서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댑테이션>은 그 누구도 아닌 카우프만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작업인 것이고,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그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댑테이션>이 풍경화 속 자기 자신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라면,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풍경화 속 자신을 타인의 시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6.

역시 원작이 있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채 끝나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 원작에는 명확한 정답이 있다. 이 이야기는 전부 영화 중간 중간 등장하는 늙은 청소부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젊은 남자 제이크도, 그의 부모님도,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까지 전부 청소부의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 젊은여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I’m thinking of ending things.”라는 독백과 함께. 다시 말해 자신이 만든 영화 속 ‘카우프만’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7.

그래서 서두가 길었지만 이제 본론. 그렇다면 카우프만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끝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끝내기 위해서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왜 자기 자신을 또 다시 영화 속에 밀어 넣은 것인가. 나는 그것이 ‘영화 만들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만들기를 끝내고 싶은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아이러니함.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머릿속에 존재하는 영화 둘 중에 먼저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인이고 무엇이 과일까. 그 속에서 제이크는 자신이 너무 많은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내뱉는다. 그는 그것을 사회적 병폐, 바이러스에 비유하며 영화를 보는 것은 뇌를 거짓으로 채우며 시간을 보내는 행위라고까지 말한다.


8.

각본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카우프만에게 원작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가 평생 안고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해야 되면 해야 될수록, 끝내고 싶은. 그것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났던 작품이 <어댑테이션>이었다. <어댑테이션>에선 원작을 각색해야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면,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선 그 모습을 비유와 상징으로 구현해낸다. 자신을 상상 속의 여러 인물들로 분열시켜버리는 모습에서, 원작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읽고 난처해하는 카우프만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맨 처음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목소리는 바로 카우프만의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하나의 목소리일 것이다.


9.

카우프만은 영화를 원작 소설과 다르게 만드는 것 외에는 ‘그것’을 끝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원작과 몇 가지가 다른데, 가장 큰 차이는 엔딩이다. 소설에는 등장인물들의 죽음이 확실히 제시되지만, 영화에는 주인공들이 죽는 모습은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게 마지막 제이크가 노벨상을 받고,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노래를 부르며 영화가 끝이 날 때, 영화는 블랙아웃도 화이트아웃도 아닌 어정쩡한 색깔의 화면으로 물든다. 나는 이것이 당신은 이 색깔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겠느냐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등장하는 눈이 덮인 차. 이 안에 시체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카우프만은 원작과 달리 노인의 죽음을 미정의 것으로 두고, 그렇게 이야기의 운명을 자신이 아닌 관객이 결정하게 한다.


10.

적응(adaptaion)이란 진보일까 퇴보일까. 어쩌면 적응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적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동의어인 것은 아닐까. 카우프만은 '적응이 엔딩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일까. 아마도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것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 그리고 그 끝을 보여준 이 영화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마도 넷플릭스이기에 가능한. 아니 넷플릭스에서도 이정도까지 제멋대로 한 사람이 있었을까. 찰리 카우프만은 이제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 같다.


end2.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왜 이 영화가 좋았나(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