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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를 굳이 반대한다고 비평했습니다.

<승리호> 비판 비평 & 후기

by 김철홍

씨네21에서 <승리호> 찬성반대 비평을 기획했다고, 반대 쪽 비평을 써달라고 해주셔서 써보았다.

1294호에 실렸다.

나는 좋게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보단 좋게 본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니 실은 안 좋게 본 영화를 두고 진짜 안 좋았다고,

그러니까 여러분 보지마세요!

하고 말하는 것 자체를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아하는 편이다.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좋은 영화에 대해 말하기도 벅차다.

이 글을 쓰는 것이 더 힘들었던 이유는 <승리호>가 딱히 안 좋게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할 얘기가 없는 영화였다.

'승리호'가 그냥 승리하는 이 영화를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영화들과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게 좋은 비평일까?

말하자면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뭐가 더 무겁고 뭐가 더 가볍다고

그것도 대놓고 '찬성/반대'의 대결 구도인 상황에서

<승리호>를 찬성하는 사람을 논리적으로 이겨야한다는 그런 무의식적인 압박과

심지어 찬성하는 사람이 누구이고(물론 아냐 정찬성)

그가 어떤 근거로 찬성하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래도 이기고 싶다 라는 생각과

이 글 하나에 얽혀 있는 많은 스토리

야심이 뭉쳐있고 힘겨루기를 하기도 하고

좋은 유아인이 뭐지 더 수준 높은 수상소가믄 뭐지하다가

아무튼 너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피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저울에 올린 영화들은 조성희 감독 자신의 전작들이었다.

<늑대소년> 그리고 <탐정 홍길동>

<남매의 집>은 도저히 어디서 볼 수가 없어서 못 봤고,

<짐승의 끝>은 봤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늑소와 탐홍을 보셨다면 좀 더 글 이해가 수월하실 것 같고

만약 두 영화를 좋아하셨다면 제 글까지 좋아하실 수도 있다.

왜냐면 나도 두 영화가 좋았기 때문이다.(그래서 내 글도 내가 좋았다)

두 영화가 좋았기에

<승리호>를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준 조성희 감독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기며.



승리호의 진짜 문제


강화 두랄루민 선체. 양자 레이더. 320만 파운드의 추력으로 최고 속도가 4만 8천에 이르는 우주선. 두랄루민이 무엇인지 48000이라는 숫자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속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해 설명하는 영화 속 한 인물은 이러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승리호를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그 말을 들은 태호(송중기)는 “그래봐야 쓰레기 줍는 배”라고 응수하고, 그렇게 영화 초반부 ‘승리호’라는 캐릭터의 성격이 손쉽게 주입된다. 말하자면 능력은 뛰어나지만 현재 그 가치에 부합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캐릭터, 혹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히어로인 것이다.

여기서 이런 캐릭터를 ‘손쉽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이러한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승리호>의 클리셰를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슬프지만 이제 어떤 한국 상업 영화에 대해 말할 때 클리셰를 지적하는 것만큼 클리셰인 것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대신 가리키고 싶은 것은 ‘어디’이다. 어딘가에서 본 캐릭터인 것까지는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출처가 그 어느 곳도 아닌 감독 자신의 영화라면 어떨까. 조성희 감독의 세 편의 장편 상업 영화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그리고 <승리호>까지. 영화의 제목이 그 영화의 주인공인 세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신세이다.


조성희의 주인공들이 처한 '같은' 상황과 예측 가능성

먼저 <늑대소년>의 늑대소년 철수(송중기)는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능력을 가진 그야말로 ‘괴물’ 같은 존재다. 그런 철수는 한 시골 마을에서 마치 애완동물처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탐정 홍길동>의 길동(이제훈) 또한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진 존재다. 홍길동의 무예와 셜록 홈즈의 두뇌를 고루 갖춘 것으로 보이는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란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는 것뿐이고, 그러다 운좋게 사라질 뻔한 마을을 구한다. 게다가 길동의 원수는 이미 노쇠한 상태이며, 길동의 기억과는 달리 실은 그렇게 엄청난 악당이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 어떤 우주선보다 단단한 몸과 빠른 속도를 가진 승리호가, 자신보다 약한 다른 우주선들로부터 우주 쓰레기를 탈취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처지라는 것이 드러날 때, 벌써부터 무언가가 예측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주인공의 처지가 무언가를 예상하게 한다는 것 또한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호>에 감독 자신의 전작에 사용했었던 설정이나 인물의 특징, 심지어는 특정 장면까지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먼저 <승리호>는 크게 봤을 때 철수가 소녀(순이)를 구하고(<늑대소년>) 길동이 소녀(말순)를 구하듯(<탐정 홍길동>) 승리호가 소녀(꽃님이)를 구하는 이야기의 반복이다. 송중기 배우가 <승리호>에서 <늑대소년>에 이어 또 ‘순이’를 찾는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공통점이겠지만, 감독이 <승리호>에서 다시 한 번 양육자와 피양육자 간의 갈등 과정을 영화의 주요 서사로 선택한 것은 다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순이와 철수, 길동과 말순, 태호와 꽃님은 처음엔 서로 제대로 된 교감을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게 되는데, 세 편의 영화 모두 그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서사의 빈틈을 메꾸는데 적극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영화끼리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아도, 감독의 전작에 사용됐던 디테일한 장치들이 신작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만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짤막하게 등장하는 회상씬에서 순이는 노트에 한글 공부를 하는데 이 장면은 <늑대소년>의 철수가 쓰던 한글 노트를, 업동이(유해진)가 순이에게 화장을 해주는 모습은 <늑대소년>에서 순이가 철수에게 장난을 쳤던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철수가 동네 시장에서 호떡을 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은 <승리호>에서 배고픈 순이가 길거리에서 판매되는(때는 2090년대이다) 와플에 손을 내미던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며, 업동이가 자신만의 상자에 돈을 모으고 있는 것 또한 <탐정 홍길동>에서 동이가 들고 다니던 상자와 같은 설정이 아닌가. 이에 더해 송경원 기자가 “이야기의 욕망”을 느껴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던(프런트 라인, ‘<승리호>를 마냥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든 이유’, <씨네21> 1293호) 강 박사의 죽음은 <탐정 홍길동>의 김병덕의 죽음과도 연결된다. 이때 살아남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아빠와 할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똑같이 ‘일하러 가셨다’인 것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월드’를 세우려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또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어떤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성희 감독의 작품은 600만 관객 수를 넘기며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냈던 <늑대소년>도, 그리고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까지도, 군데군데 비판을 받은 지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마음이 전달되는 영화인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의식적으로 반복했던 것처럼 ‘이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하다보면 끝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늑대소년>), 아픈 과거를 훔쳐간 자들로부터 다시 그것을 탈환하고 싶은 마음(<탐정 홍길동>)이 결국 와 닿았기에 정상 참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마음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망을 느꼈다. 매작품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냈던 조성희는, 정도가 지나치지만 실제 괴물로 변해버리는 ‘늑대 인간’을 만들어버렸고, 정도가 지나치지만 어느 시기에도 존재하지 않는 탐정 홍길동을 만들었다. ‘지나친 정도’란 곧 욕망이다. 지나치면 지나칠수록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이 들겠지만, 그만큼 누군가는 마음을 훔침 당한다.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은 그런 의미에서 시도를 인정받은 작품이지만, 과연 <승리호>에 진정한 시도란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완벽하진 않지만 선의로 가득찬 ‘조성희 월드’를 세우려는 욕망이 이 영화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성희 감독의 영화는 항상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승리호>는 좋은 영화였을까. 자신의 새로운 월드를 위해 다른 월드의 것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만든 월드를 좋은 월드라고 할 수 있을까. 지구의 것을 화성으로 옮기려던 설리반 회장은 죽고, 무언가를 깨달으며 눈물을 흘리던 태호는 승리호로 유턴한다.(이 유턴이 한국영화에서 숱하게 반복되는, <택시운전사>의 만섭으로 대표되는 그 유턴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다른 아이를 이용하는 아빠는 좋은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 답이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인걸까 아닌 걸까. 그래서 더 아쉽고, 그래서 더 문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얘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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