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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하는가

by 김철홍

<씨네21> 1318호에 실린 글. 지면에는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의 엔딩에 대하여' 라고 나갔다.

<모가디슈>의 엔딩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했고, 엔딩에 대하여 자세히 쓴 글은 맞으나, (당연히) 영화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무엇으로부터 탈출하는가'라는 제목이 나는 더 좋다. <모가디슈>의 영어 제목이 "escape from Mogadishu)"이기도 하고. 결국 <모가디슈>의 엔딩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또 이 엔딩이 좋았던 것도, 어떤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영화가 잘 표현해 내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니까. '엔딩'은 영화의 여러가지 표현 방식들 중 하나에 불구하다. 그렇지만 엔딩이 정말 너무 좋았던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고, 또 누군가 이 제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가 글을 잘 못 쓴 것도 맞겠다.


지면에만 나가는 비평 후기에는 '남북 이념 갈등을 다루는 영화, 예컨대 <실미도>나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는 더 이상 한국에서 유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류승완의 대답은 No였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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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는 무엇으로부터의 탈출하는가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측 차량에 탄 신성(김윤석)의 표정을 창밖에서 건조하게 비추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크레딧이 오른다. 여기서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것은 그렇지 않는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화들은 이야기를 이야기가 끝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겪은 인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자면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다음 선택에 생긴 모종의 변화를 보여주는 에필로그로 끝을 낸다. 주로 편견으로 가득찼던 인물이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시대극의 경우에는 시계를 (관객이 살고 있는) 현재로 돌리기도 한다. 예로 <국제시장>은 황정민을, <택시운전사>는 송강호를 분장까지 시켜가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모가디슈>의 ‘여기서 끝나는’ 엔딩과, ‘여기서 끝나지 않는’ 다른 엔딩을 두고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영화들에서, 앞에서 든 예시대로 표현하면 그 영화들의 '분장'에서, 어떤 욕망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영화를 통해 영화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욕망. 자신이 찍는 대상 자체보다 이것이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해 더 관심을 두는 영화. 모든 영화들이 얼마간 그런 반응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겠지만, 그 의도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좋다'라는 생각을 한 까닭은, 타인이 어떻게 볼지에 대해 미련을 버린 엔딩의 태도가 <모가디슈>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가디슈', 시선의 전쟁터

<모가디슈>가 진행되는 배경은 1990년대 초, 우리나라가 UN가입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소중한 한 표를 절실히 바라던 시기이다. 이때 이 절실함에는 이미 남한이 북한보다 먼저 세계 무대에 진입해야 한다는 경쟁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말하자면 UN가입 그 자체보다, 세계의 시선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초반부 양국 외교관들의 모든 행위들은 그런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현재의 시점에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 우스꽝스러움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한신성은 등장부터 보여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현수막이 국가 간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을 하고, 사진을 찍는 직원에게 프레임에 절대 잘려선 안 되는 것들을 주지시킨다. 기념사진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행사라는 본질보다 보여지는 것에 더 포커스를 맞추는 행위다. 이어서 영화가 카메라를 들어올린 직원의 모습을 정면으로 보여준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때, <모가디슈>라는 영화는 그 보여주기식 사진의 결과물처럼 보이게 된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보여주기식'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다. 강대진(조인성) 또한 첫 등장부터 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공항에 도착한 그의 얼굴보다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그가 직원에게 '보여주는' 대한민국 여권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신성이 소말리아 대통령에게 줄 선물을 확인할 때도 가장 세심히 챙기는 디테일은 올림픽 개막식 영상에 소말리아 선수단이 잘 보이는 지이며, 그 선물을 북한 측의 계략으로 잃게 됐을 때 신성과 대진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 또한 제3의 시선인 언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두 명의 주요 캐릭터 외의 다른 인물들 역시 늘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있다. 대사관에서 일하던 소말리아인 직원이 피를 흘리며 나타났을 때(공교롭게도 신성과 대진은 그곳에 없다), 명희(김소진)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은 당연히 그를 도와야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호의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출지에 대해 의식하느라 손내밀기를 망설인다. 그러다 못내 소말리아인을 거두게 되는데, 만약 그가 스스로 담을 넘지 않고 문밖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담은 영화 중반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이 담은 모가디슈이지만 모가디슈가 아닌, 바꿔 말해 한국이 아니지만 한국인 남한 대사관과 바깥을 구분짓는 유일한 경계다. 이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인물들이 대치를 하는 장면은, 계속해서 그들을 압박하던 내적 갈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목숨이 걸린 위험한 상황에서 같은 민족 사람들을, 아니 그냥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건 큰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남측은 최후의 순간까지 북측을 대사관에 들이는 것을 망설이고, 마찬가지로 들어가는 사람 또한 쉽사리 들여보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침내 선을 넘어(그리고 시선을 넘어) 한 지붕 아래에 있게 된 두 진영은 천천히 마음을 열게 된다.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그들은 최소한의 시선 처리와 함께 밥을 먹는다. 그들은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않음에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상대방에게 먼 반찬을 조금 밀어줄 때, 그리고 (아마 한국 사람만 아는 게 확실한) 잘 떨어지지 않는 깻잎을 젓가락으로 살짝 잡아줄 때, 그들은 애써 눈을 피하지만 조금씩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날 쏘고 가라'에서 '돈 슛, 코리아'로

두 그룹은 마침내 머리를 맞대어 탈출 방안을 마련하여 이를 실행에 옮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자동차 도주 씬에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함께 영화의 시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카메라가 차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시각적 쾌감과 별개로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거대한 이념이 만들어내는 총알 같은 시선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 영화적으로 표현된 장면이 아닐까. 그렇게 이탈리아 대사관 앞에 도착한 이들에게 마지막 위기가 찾아오고, 앞에는 이탈리아의, 뒤에는 반군의, 옆에는 소말리아 정부군의 총과 눈이 그들을 향해 있는 순간, 신성은 대답한다. "Don't shoot, Korea". '쏘지말라, 코리아다'라고 말하는 이 절규는 세상을 향한 선언처럼 들린다. <실미도>의 훈련대장 재현(안성기)의 "날 쏘고 가라"를 정반대로 뒤집은듯한 신성의 이 선언은, 이념이 만든 괴물 같은 '실미도'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 무서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재현의 선택으로부터 한 발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순간 신성은 시선의 전쟁터와도 같았던 '모가디슈'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이 탈출이 있었기에, <모가디슈>의 엔딩은 더욱 울림을 준다. 엔딩씬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하자 그곳에 또 다른 한반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남측 직원과 북측 직원들은 선글라스를 낀 채 악착 같이 '서로 보지 않기'를 하고 있다. 개인의 시선까지 통제하는 시선들의 밭에서 신성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신성은 비행기에 내린 후부터 서로 모르는 척을 하기로 하고 그렇게 하는데, 바로 그때부터 영화는 북한 인물 쪽의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만약 신성이 한 번이라도 고개를 용수(허준호) 쪽으로 돌렸다면 우리는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당신은 그 소리가 궁금했는가. 당신 또한 신성이 제발 고개를 돌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모가디슈>의 엔딩은 당신에게도 더할나위없이 좋은 엔딩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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