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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홍 Sep 03. 2021

플래너를 쓴다는 것

몇 년 전부터 스케쥴 관리를 위해 플래너를 쓰고 있다. 생각해 보니까 꽤 오래된 듯하다. 대학 다닐 때부터 썼으니까. 과제 마감 기한이나, 조모임 같은 것 몇 개.. 하면서 동시에 알바 일정이나 그 외 대외모임, 그리고 가끔 있는 밥 약속들, 양꼬치 약속들. 그리고 내가 언제 무슨 영화를 봤는지. 이런 것들을 머리로 기억하는 것의 한계를 그제서야 느끼고 기록해야겠다 생각한 듯하다. 어플보다는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을 좋아했고, 손글씨 쓰는 건 지금도 좋아하고, 아무튼 쓰다 보니 지금은 다 떠나서 그냥 기록하는 것 자체가 재밌는 상태다. 그러니까 플래너의 시작은 다른 사람들과 여러 가지 형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썼던 것이지만 점차 그것이 나의 기억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로 옮겨간 것이다. 본 영화의 이름을 적어놓는 것이 그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like 셀프 왓챠.


플래너에서 애용하는 부분은 monthly plan을 기록하는 페이지이다. 두 페이지를 걸쳐 서른 개 정도의 칸이 그려져 있는, 말하자면 작은 달력이 가로로 긴 종이에 그려져 있는 이 페이지의 빈칸을 채워나가는 맛이 있었다. 그 칸에 무언가 빼곡히 써져 있는 것을 보며, 내 한 달 또한 빼곡했구나,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인데, 반대로 아무 것도 안 했을 시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특히 영화보기의 주기를 확인했을 때 가끔 그런 걸 느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영화 한 편을 안 봤다고?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거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끔 하루에 두 편 보기도 하고. 그러면 또 꽉 찬 칸을 보며 뿌듯해 하기도 하고. 그러나 어찌 됐든 사람이 한 달을 살다 보면 아무 것도 안 하는 하루가 있을 수 있고, 그게 우연히 며칠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걸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그저 '칸'으로써, 이 칸이 채워져 있느냐, 비워져 있느냐, 아날로그식으로 표현해서 0이냐 1이냐 했을 때 0이면,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느껴진다는 거다. 그래서 되도록 분산해서 칸을 채우는 것을 선호한다. 분산해서 채운다는 것은 그저 빈칸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물론 그것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 하루가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졌을 때 그것을 소화하기 힘들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도 크다. 갑자기 내 칸들을 공유하자면 29일엔 서울여성영화제 <시바 베이비>가 쓰여 있고, 28일엔 연극 <붉은 머리 안>, 27일에는 <D.P.>, 26일은 비어 있고, 25일엔 <남색대문>이 있다. 24일은 <바쿠라우>.


26일엔 원래 <데칼로그 1,2>가 쓰여 있었으나 지웠다. 손으로 쓰는 플래너의 가장 큰 단점은, 무언가 하려고 적어놨다가 취소했을 시 수정이 편치 않다는 것이다. 보통 펜으로 적으니까 그게 취소됐으면 그 위로 줄을 쫙쫙 긋거나, 찌끄찌끄 해야 한다. 물론 이 찌끄찌끄 또한 소중한 기록인 것도 맞다. 있었다가 없어진 것과, 원래 없던 것은 다르다. 다시 아날로그로 말하자면 이건 분명 0도 아니고 1도 아니다. 여기엔 어떤 흔적이 있다. 이 흔적을 보며 아쉬운 마음에 다음 일정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싶은데 훗,,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보고 싶은 영화는 항상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며, 영화가 아닌 사람도 그렇다. 그 영화는 그 영화의 나름의 일정이 있는 것이고, 그 사람 또한 그 사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가끔 나의 지나간 칸들을 보며 아련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몇년 몇월 이때는 이 사람을 만났었구나. 그런데 그날이 그 사람과의 마지막이었구나.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이 수많은 찌끄찌끄들이다. 그 사람과 그 칸을 채우지도 못했다는 것, 그 날이 마지막인지 아니면 마지막이 아닌지 알 수도 없었다는 것이, 더 슬프다. 그래서 플래너란 원래 어떤 약속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약속이 일어나기 전에 쓰는 것이 본래 목적에 맞는 것이겠지만, 나는 누군가와 만남 약속만큼은 가능하면 미리 쓰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이미 만난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사람의 이름을 빈칸에 적는다. 왜냐면 못 만날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이 언제 마음이 바뀌어 못 만난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혹은 그런 말 조차도 안 들려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떨 땐 꼭 보고 싶은 마음에,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이든 영화든 이름을 먼저 적을 때가 있고, 아니 그건 어떨 때가 아니라 꽤 자주 있는 일이고, 아니 진짜 사실은 이번 달에도 일어난 일인데 부디 9월엔 그게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0보단 그게 나은 것일지도 몰라. 잘 모르겠으니까 자꾸 혼자 영화만 본다. 사람의 마음은 바뀔 수도 있지만, 영화는 마음을 안 바꾸니까. 그렇게 김철홍의 플래너는 영화 제목들로만 가득 차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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