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국 베스트 영화 선정의 변
나는 왜 이 영화를 베스트로 뽑았나, 에 대한 기록.
먼저 한국 영화에 대해 쓰고, 외국 영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계속합니다.
<사라진 시간>을 내가 너무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보다 높게 평가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진영 감독의 영화가 홍상수 영화보다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는 정말 본 적이 없어..는 홍상수의 신작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데, 그런 감흥을 50대 한국 신인 감독으로부터 느끼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그 감독이 이미 널리 알려진 배우 출신일지는 더욱이 예상하지 못했다. <사라진 시간>에 대한 고평가는 분명 이런 감독의 정체성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라진 시간>을 1위로 선정한 이유에 대하여 “올해 한국영화 중 가장 강렬한 정체성을 드러낸 영화”라고 썼는데, 이는 중의적인 의미로 쓴 것이다. 첫째는 영화가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라는 뜻이고, 둘째는 말 그대로 다른 한국영화들보다 눈에 띄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한국영화스러웠기에, 다른 어떤 영화들을 따라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럼으로써 정체성을 드러냈기에 좋았다는 뜻이었다. 나의 올해의 한국 영화 리스트는 그러한 기준으로 작성한 리스트이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들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영화들과 견주어도 항상 맨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올해는 <사라진 시간>이 더 ‘myself’ 하고 있는 영화였다고 본 것뿐이다. <사라진 시간>의 정체성에 관한 자세한 글은 조만간 새로 시작되는 영화 잡지 한 곳에 글을 쓰기로 약속해둔 상태다.
<도망친 여자>에 대해서는 “영화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 영화로 도망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도망침이 2020년 가장 큰 위로를 줬던 것은 분명하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도망치는 방향과 대상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쓴 것은, 관객으로서의 책임 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모르겠음’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영화에서 아무 것도 단정 짓지 않으며 무한한 가능성의 ‘홀’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홀’은 반드시 영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클레어가 드나드는 해변의 그 이상한 동굴 같은 곳 말이다. 어떻게 이어 붙여도 말이 되고, 어떻게 이어 붙여도 말이 되지 않는 무언가가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홍상수는 애초부터 무질서를 만들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테넷적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을 엔트로피화 시키는 영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한 여자가 도망쳤다’고 했을 때 어디로? 어디에서부터? 라고 질문하는 것은 애초에 홍상수 영화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다. 그렇게 결국 김민희의 마지막 행선지가 그 어디도 아닌 영화관일 때, 2020년 이토록 영화관에 가는 것이 위기인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는(적어도 나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 올해 영화로부터 도망쳤던 사람이건, 영화로 도망쳤던 사람이건 말이다. 홍상수는 물론 아무 의도 없이 만든 것이라고 부인하겠지만.
<사냥의 시간>에 대해서는 윤성현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는 표현으로 선정의 근거를 썼다.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의 반 이상은 성공한 데뷔작인 <파수꾼>과의 비교로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이는 윤성현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파수꾼>이 없었다면 <사냥의 시간>은 이렇게 조리돌림 당할 영화로 평가받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데뷔작’이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적이고 성립하지 않는 말이지만, 나는 한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른 영화와 비교되어 평가받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행위로’ 평가 받아야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저렇게 써봤다.
<남산의 부장들>의 우민호 감독과 <반도>의 연상호 감독 또한 자신의 전작과 비교당하며 신작을 과소평가 받는(때로는 놀림거리가 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4위에 ‘우’ 감독의 영화를 올리고 ‘연’ 감독의 영화를 올리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연상호는 세간의 그러한 평가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은 결과물을 낸 것으로 느껴졌고, 우민호는 덜 받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각 감독들의 전작, <염력>과 <마약왕>이 더 좋다.
마지막으로 꼽은 영화는 <에듀케이션>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인스타그램에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고,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이라는 알쏭달쏭한 표현을 적었는데, 슬슬 알아차리셨겠지만 알쏭달쏭한 영화가, 내 취향이다. 영화는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간결하고 담백하게 진행된다. 물론 그 간결함이 ‘졸업 작품’이라는 특성상 제작 과정에서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그런 제약 속에서 참신한 창의력이 탄생되기 마련이다.
그 외에 언급하고 싶은 영화로 손원평 감독의 <침입자>와 김용훈 감독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 있다. 두 영화 전부 굳이 표현하면 대중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는 장르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감독의 개성이 돋보인 작품이라고 기록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