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1년 이상 쓰는 게 없을 정도로 잘 잃어버린다. 핸드폰도 그런 위기를 많이 겪었고 같이 사용하는 에어 팟 프로도 벼르고 벼르다 구매했는데 아쉽게도 오래 하지 못했다. 지인이 각인까지 해서 가죽커버를 구매해 줬는데 출장길에 호텔에서 혹은 식당에서 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고는 한동안 예전에 쓰던 골전도 이어폰을 사용했다. 진동을 이용해서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의 나름 신박한 이어폰인데 이것도 얼마 전에 떠나갔다. 이 정도면 뭘 산다고 하기도 미안해서 포기할 만도 한데 뻔뻔하게 운전 중 통화에 스피커폰이나 차량 블루투스 통화보다 무선 이어폰이 낫다는 궁색한 이유로 다시 새로운 무선 이어폰을 구매했다.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로망'하던 이어폰을 구매했다. 벵앤올룹슨에서 나온 나름 고가 제품인데 마음은 있었지만 차마 산다고 못하다가 그냥 질렀다. 이제 끝사랑처럼 소중히 쓰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결재를 득했다.
피천득 선생은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늙고 마는 인생'이라고 했다는데 내 인생은 어쩌면 매년 이어폰 하나 씩 버리면 금세 지는 인생이 되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덤벙거린다.
무려 기존 에어 팟 프로보다도 고가의 내 생애 가장 비싼 이어폰을 구매했다. 물욕이 많다 적다를 떠나서 오랫동안 고대하는 제품을 맞는 기분은 삼삼했다. 가죽 케이스에 회사의 로고가 고급스럽게 새겨 있는 모습은 잠시 심장이 떨렸다. 이게 뭐라고 블루투스 페이링 하고 들어 본 음질은 역시 1925년에 창립해서 현재까지 업계에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 듯 최고였다. 청음을 해서 아는 수준은 아니고 명성에 편승한 감상일 수 있지만 또렷하고 풍부했다. 앱으로 조절하는 기능도 마음에 쏙 들었다. 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트루 컬러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듯했다. 새로 산 어른 장난감에 앱에 설정도 바꾸고 개인화도 하면서 밀월의 시간을 보냈다.
슬픈 이별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치약을 중간에서 짜거나 처음부터 짜거나 같은 사소한 일이라면 그냥 너머가 줄 수 있다. 그런데 이건 같이하기에는 치명적 결함이다. 한 번도 함께해 본 적 없기에 그 사람 좋다는 말에서 다 포함할 수 없는 그 무엇 같은 부분이다. 5년을 알던 직장 상사가 있었다. 그때 나는 회사의 생짜 신입이었고 상사는 노총각 과장이었다. 지금 보면 30대 후반밖에 안 되는 그를 노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노총각이 맞았다. 프로젝트 파견 함께 나갔다 종종 본사에 올 때면 맛있는 간식도 사 오고 사원들에게 좋은 말씀도 하는 인상 좋은 상사였는데 파견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동안의 본모습을 못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같이 먹고 자고 일하는 환경에서 본 K과장은 지금으로 치면 꼰대 중에 상 꼰대였다. 김치 없이 밥을 못 먹는다고 강짜를 부렸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근엄한 상전 노릇을 했다. 내가 알던 그 과장 맞나 싶었다. 역시 사람은 살면서 겪어봐야 안다.
결국, 최고 브랜드의 무선 이어폰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내 귀가 이상한지 그 녀석이 이상한지 귀에서 자꾸 떨어진다. 아무리 음질과 통화음이 좋아도 이어폰이 귀에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수영 못하는 수영코치고 VR장비를 못쓰는 VR 사업가 같은 상황이다. 보통은 비싼 제품이 좋을 확률이 높다. 소비자들의 안목으로 본다면 그런데 가끔은 무작정 비싼 것을 맹신하다가 이런 우스운 꼴이 된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같이, 너무 좋은데 나한테는 맞지 않는 그 물건들을 내려놓고 잘 맞는 제품을 써야겠다.
그냥 먼발치에서 '좋은 과장 K' 였을 때가 아름다웠다. 뱅앤올룹슨 무선 이어폰도 그냥 선망하던 관계였다면 아름다웠을게다. 어쩌면 네겐 너무 과분한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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