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보이는 그때

-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

by hanxs


20대 말에 해외로 프로젝트를 갔었다. 처음 가야 할 사람으로 선정되었을 때 거절했다. 입사한 지 1년도 안돼서 해외 프로젝트를 한다는 건 특별한 기회였지만 두려웠다. 말레이시아의 통계청에서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하기 위한 파견이었다. 회사에서는 이 좋은 기회를 거절한 나에게 너무 황당하다는 반응과 함께 내 사수를 통해서 설득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떠났다. 생에 처음 이국땅으로 떠났다. 국내에서 비행기 타고 제주도도 못 가본 촌놈이 첫 비행을 동남아시아로 갔다.


6개월 만에 무사히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집과 회사 이외의 세계와 접속을 끊었다. 한 참 코딩을 해야 하는 신입시절에 해외, 실리콘밸리 같은 선진국에 간 게 아니고 한국보다 낙후돼 있는 IT 국가에 갔다 왔다는 사실이 조급함을 가져왔다. 동기들은 6개월의 시간 동안 능력이 월등해진 상태다. 나는 능력 향상 없는 제자리걸음을 하다 돌아왔다는 공포감에 하루라도 빨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부단히 무엇인가를 찾아 분주했다.

그렇게 한국에 와서 3개월여를 보내다가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 졸업반 때 1년 정도 매일 저녁 시간을 같이한 영어학원 동기들이 있다. 구성원은 다양한 4인이다. 나는 대학생으로 막내였고 중간에는 도서관 사서와 초등학교 선생님 그리고 모임의 반장은 당시 30대 후반의 현대자동차를 다니는 대학 10년 선배가 있었다. 우리 네 명은 영어학원을 친목도모의 장으로 전환하며 지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놀이가 있다. 볼링도 치고 치맥도 하고 당구도 치며 다양하게 유흥을 즐겼다. 선배 형의 기동력과 재력을 기반으로 센스 있는 누나들과 착실한(?) 대학생의 조합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선배는 특히 나를 아꼈다. 이 선배가 회사에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말레이시아로 떠난 지 9개월 가까이 되는데 통 소식이 없어서 전화를 한 것이다. 마침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직원이 전화를 받고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00은 3개월 전에 귀국했다고 지금 잘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기에 발생한 사건이데 , 형은 그 일로 많이 서운해했다. 당연히 한국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연락해서 만날 줄 알았는데, 만나기는 고사하고 연락도 하지 않은 나에 대해 서운한 게 당연했다. 나는 왜 그랬는지 장황하게 혹은 어눌하게 설명했던 것 같다. 형은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 후로 이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도 문뜩 그 형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의 형 보다 10년이나 더 나이가 들고 보니 비로소 보인다. 내가 얼마나 조급 해했던가를 무언가 불확실하고 가진 것 없는 빈곤함에 부여잡고 싶었던 '무엇'에 대한 줄달음이 소중한 관계를 앗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이. 인생에 만약을 대입하면 끝이 없지만 만약 그때 한국에 오자마자 전화를 내가 했더라면, 3달이 되었을 때 회사로 온 전화를 내가 받았더라면, 서운해하는 형을 덤덤히 놔주지 말고 끝까지 이해와 미안함을 구했더라면 지금 어땠을까?


그 후로도 띄엄띄엄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해외 파견 이전 관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이제 그때가 보인다.

지금도 미래 어느 날의 그때가 될 터인데 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다.

군대에서 익힌 기술 중 그나마 쓰임새 있는 걸 꼽으라면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이다.

멀리. 가까이. 중간, 사격할 때 과녁의 순서다.


인생에서 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멀리도 보고 가까이도 보고 중간도 보는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속으로 중얼중얼거리면 재미도 있다.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




#hanxs #사격 #인생 #관계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냥 사람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