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아내의 아빠가 아니다
엄마는 과정을 중요하게 봤다. 결과도 중요하다고 했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그래도 과정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결과에 비해서 상대적일 뿐 엄격한 잣대로 아들을 몰아세우는 법은 없었다. 사실은 과정이나 결과에 무관하게 거의 맹목적으로 지지해주셨다. 엄마니까. 나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들로서.
집안일이라고는 가끔 설거지하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정도가 다인 간 큰 남편으로 살다가 철퇴를 맞았다. 퇴근하고 평소와 같은 저녁, 바깥은 여름인데 집안은 겨울처럼 서늘함이 느껴졌다. 냉기의 출처는 냉장고에 낳 선 A4지 한 장이었다. 처음 보는 인쇄물이지만 알고 있는 내용이다. 낮에 메신저를 통해서 파일로 받은 문서였다. 파일을 출력한 종이를 사무실에 놓고 왔다가 황급히 동료에게 챙겨달라고 해서 가져온 '소중한' 문서라며 잘 보고 숙지 후 실행하라는 추상같은 어명이 내려졌다.
요약해 보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에 집안일을 적어 놓은 To do list다. 간단히 말해서 문서는 '간 큰 남편 작업 지시서' 다. 그동안 아내가 하던 일을 남편에게 위임하는 내용이다. 항목은 빨래와 청소의 대주제 밑에 수건류의 빨래와 아이 빨래 그리고 색깔 옷에 대한 주의 사항 등이 적혀 있다. 청소 부분에는 화장실 청소와 거실, 방 청소에 대한 주기와 신경 써서 청소해야 할 장소에 대한 내용이다.
So simple / 단순하다 /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나의 대응은 일단 Doing이다. 한다. 일단 한다. 반항하지 않는다가 철칙이다. 완전하지 않아도 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마인드로 작업지시서 내용을 수행했다. 결과에 대한 불평이 나왔다. 일단 했으면 칭찬을 하거나 적어도 다음에 개선하는 방향의 완곡한 '전달'이면 좋았을 텐데 '마음 상처주기' 고급과정 최우등 수료자처럼 뼈 때리는 말을 가감 없이 한다. 물론 내공이 있는 자로써 쉽게 내상을 입지 않지만 한 번 두 번 지속적인 공격에는 심리가 흔들렸다. 참다가 역치에 다다르면 회심의 반격을 한다. 뼈 때리는 말 먹어버리기 신공을 펼친다. 대꾸하지 않고 그냥 먹어 버리기. 화내거나 인상 쓰거나 하지 않지만 분명한 의사 표현이다.
'나 화났다. 더 이상 건드리지 마라'
엄마는, 장남이자 외아들인 나에게 잔소리 한 번 안 하셨다. 딱히 집안일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기에 착실하고 말 잘 듣는 아들에게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청소며 빨래며 요리 등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직장에서는 능력과 카리스마로 인정받고 집안에서는 백종원급으로 요리도 잘하고 청소며 빨래도 척척하는 '유니콘 같은 남자'로 거듭나지 못했다. 물론 아내가 그런 남자를 요구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아내가 생각하는) 기본만이라도 하라는 요구인데 평생을 안 하고 못했던 내가 한 두 달 만에 마음에 들리 만무한데.... 자비가 없다.
아내는 엄마 같지 않다는 사실은 알만한 나이의 남자다. 하지만 집안일, 그게 뭐라고 그렇게 화를 낼까 싶기도 하다. 밥이 좀 꼬들꼬들하다고 빨래가 좀 밀렸다고 화장실에 좀 물 떼가 있다고 사랑하는 남편을 그렇게 말로 때려도 되나 싶다.
엄마는 안 그랬는데...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리콜을 요청하지만 AS기간이 지난 지 오래다. 7년 넘게 쓰다가 리콜 요청하면 누가 해주나, 진작에 했어야지. 이제 그냥 알아서 고쳐 쓰거나 포기하는 선택지만 남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뚱이는 연식이 조금 되기는 했지만 머릿속 '사고'는 젤리처럼 말랑해서 신인류로 거듭나는 업데이트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엄마가 아니었고
나도 아내의 아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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