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는 바라지도 않는다.

- 살갗이라도 보여줘라

by hanxs

책을 선물 포장이 아니라 읽을 때 겉장이 보이지 않도록 싸서 주는 서점이 있었다. 서점의 주인은 신혼부부인지 조금 더 된 부부인지는 모르지만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린 내 눈에도 감지됐다. 시도 때도 없는 사랑 표현이나 눈 맞춤으로 주변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은은하고 내밀하지만 조곤 조곤 한 대화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사랑하고 있고 존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단골 서점이다. 얼마 전에 인천 본가에 가서 오래된 책-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 속에 꽂여 있는 코팅된 책갈피를 보는 순간 시간은 30년 전 고등학생으로 돌아갔다. 032-00-0000 전화번호마저 소박하게 두 자리와 네 자리였다. 이 서점을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책을 싸서 준다는 점이었다. 무슨 책인지 내가 펼쳐 보여주기 전에는 타인들은 책의 제목에 도달할 방법은 없었다. 소설인지 시집인지 빨간책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때의 추억 때문은 아닌데 최근에도 사용하는 아이템을 보니 내가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노트북에는 보안필름을 넣었다. 블루라이트도 막고 남들의 시선에도 자유로워서 만족도 높은 제품이다. 회사에서나 카페에서 내가 뭐하나 하고 주시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얼핏 보이게 되는 상황마저 신경이 쓰인다. 말하지 않아도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수단이다.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화면 전체 보안을 걸어놔서 1분이면 화면이 잠기는 설정뿐 아니라 앱에도 별도 암호를 해 놓는다. 지문 인식, 홍채 인식, 비밀번호, 핀 번호 등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다 쓴다. 전자 장치에 보안이 오프라인으로 와서 구현된 건 다시 '책'이다. 빨간책을 몰래 보는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꼭꼭 숨길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한다. 가죽 북커버를 쓰다가 최근에는 세상의 모든 포장이 가능한 종이를 다 활용해서 책을 싼다. 신문지는 기본이고 식당에 메뉴를 적은 종이도 좋고 전시회나 갤러리에서 소개하는 한 장 짜리 브로셔도 좋다. 소모품처럼 오래 커버 역할을 하지 않을 거면 지역 소식지나 무가지 같은 재질의 종이가 좋고 조금 더 오래 지속해야 한다면 종이에 힘이 있는 전단지가 좋다.


한때 '소중한 것 먼저 하기' 같은 자기 계발서를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사서 보는 일은 드물다. 차츰 삶에 나이테가 깊어지면서 계발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는 범주에 포함되고 상당 부분은 실천하고 있다고 자만심으로 살다 보니 조금씩 다른 책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유전자, 미학, 심리학, 마케팅, 유튜브, 몽블랑, 종기 접기, 에세이, MBA, 시집, 기획, 엑셀, 노인학, 자서전, 부동산, 주식, 코딩 등등 서로 간의 맥락이 없이 닥치는 대로 집어 들어서 책 사재기를 했었다. 그러다 보니 정체성을 찾아야 해서 잠시 책 사는 일을 쉬고 있다. 사회 속에 나에게 기대되는 모습에 준해서 살아가고 있는 자아와 그냥 자연인 나의 삶의 괴리가 크다 보니 내 내면의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은 보호본능의 발현이 바로 책을 싸는 일로 표출된 것이다.


나쁜 일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 왜 지금 그걸 해?"라는 시선에 대한 과민반응이라 할 만한 대응이다.

내가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노출하는 건 왠지 내 머릿속의 현재를 보여주는 같은 민망함이 있다. 남들은 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있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정도의 10%도 안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실천 못하는 자기 계발서서 흔하게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지금도 책상에 영자 신문지를 두르고 있는 책이 있다. 햇빛에 색이 바랬고 책날개에 접인 부분은 헤져서 너덜거릴 만큼 오래전부터 나를 유혹하는 책이다. 낡은 신문지에 날짜를 찾아보니 '2017'이 쓰여있다. 적어도 3년 동안 내 곁에서 자극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책의 제목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이다.

뼈는커녕 살갗도 드러내기를 주저하고 있지만 더디게 라도 가고 있는 중이다. 살에서 뼈로



#hanxs #글쓰기 #솔직함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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