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에서 건져 올린 서늘한 문장들
엄마는 책을 좋아했고, 좋아한 만큼 집에 책이 항상 가득했다.
서점에서 신간 홍보 책자를 가져와서 읽었고,
마음에 드는 몇 권의 책을 구입하여 책장에 꽂았다.
엄마가 고른 책들이 항상 흥미를 끌었던 건 아니다.
대신 그 책장 속에서 세상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엄마는 시집을 특히 좋아했고 나는 이따금 그 책들을 꺼내 몇 장쯤 휘리릭 넘겨보곤 했다.
그렇게 몇몇 시인의 이름과 그 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 세계적인 명화들과 그 해설들을 읽곤 했다.
시간이 지나 엄마는 내가 고른 책들도 사주기 시작했는데, 불행히도 우리는 둘 다 책 욕심이 많았다.
분명 책값이 꽤 나왔을 텐데도 엄마는 한 번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게 재미있어서 책을 더 많이 사달라고 했다.
우리는 점차 책장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심심하면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읽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내가 읽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책들을 따로 숨겨놓기 시작했다.
왜 부모는 자식이 모를 거라고 착각하는 걸까?
그 책들은 반드시 찾아내서 읽어보는 게 내 재미였다.
어느 날 숨겨진 책장에서 한강의 몽고반점을 읽었다.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었고 나는 고1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여자의 몸에 꽃을 그리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대로 사라질 것 같지만 또 다 그렇지도 않아서,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떠올려보다가 또 어느 순간 그냥 이해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고전 문학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교과서나 문제집에 발췌되어 있는 소설이 궁금하여 찾아본 게 시작이었는데,
그 책을 교실에서 읽는 게 좀 멋있어 보였다. (중2병이었음)
멋있긴 했는데 내용이 다 재미있지는 않아서 몇 장 넘기다가 곧잘 포기하기 일쑤였는데
그때 나랑 똑같이 중2병에 걸려있었던 것 같은 짝꿍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재미없어도 일단 100페이지는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읽어.
그러다 보면 재미가 붙기도 하고, 판단은 그때 가서 하는 거지."
중2병끼리 통하는 게 있었나 보다.
그 말이 멋있었다.
짝꿍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0페이지쯤 읽으면 지금까지 읽은 게 아까워서 오기로라도 끝까지 읽었고,
재미있었다면 무리 없이 쭉쭉 나아갔다.
그때부터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어렵지 않아 졌다.
고등학생 때는 모의고사에 나오는 시가 재미있었다.
비문학이나 소설보다 시에서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시의 해석은 내 멋대로였는데 (중2병이 완벽하게 다 낫지 못했음)
그러다 보니 채점해 보면 언어 영역 점수가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되게 잘하는 것 같았다가, 어느 날은 영 잼병이 되었고...
엄마와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얘는 뭐지 하는 눈빛으로 보곤 했다.
엄마는 수리나 외국어는 별말 안 했지만
언어 영역은 시험지를 가져와서 내가 내린 오답의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대체 왜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글을 있는 그대로 읽어!
그건 너만의 생각이겠지.
나는 끝까지 그런 부분을 고치지 못했고 예상하다시피 뭐... 수능 점수도 모의고사와 비슷했다.
어떤 날은 진주귀고리 소녀라는 소설에 대해 엄마와 이야기했다.
그 소설이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읽은 후였다.
그런데 홍보 책자에서 그 책을 러브스토리로 소개하고 있었고, 그 설명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이거 책 읽고 쓴 거 맞아? 그게 무슨 사랑 이야기야?
엄마는 내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봤다.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이나, 우정이나, 뭐 그런 종류의 감정 아니었어? 나이 차도 엄청난데?
그렇게 생각해?
엄마는 내 말에 반대도 긍정도 하지 않았기에 도리어 그 물음은 내게 오래 남았다.
그, 렇, 게, 생, 각, 해?
요즘 대만 여행을 앞두고 여행 책자를 뒤적이고 있자 아들이 옆에서 같이 넘겨보며 참견을 시작했다.
오, 이건 먹어줘야지!
와 이거 진짜 맛있겠는데?
엄마, 여행은 먹으러 가는 것 같지 않아?
으응...?
일단 시를 읽는 엄마가 되는 건 실패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