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절기상으로 처서를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시간. 이번 글에서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사계를 담아보았다. 다가올 가을부터 순차적으로 담은 계절을 소개한다. 위의 사진은 창경궁 후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유명한 출사지인지 카메라를 가져온 이들이 연달아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여러 나무들 사이에서 서성이다가, 단풍나무 아래에 적당한 자리를 잡았다. 나무줄기를 타고 시선이 올라가도록 구도를 잡은 뒤, 이를 사진으로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한동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스칠 때면 단풍잎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듯 가볍게 흔들렸다.
가을 단풍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 궁궐 안은 단풍구경을 하러 온 이들로 북적거렸다. 인파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단풍들을 바라본다. 햇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단풍의 빛깔은 찬란하지 못해 눈부시다. 늦가을 단풍은 붉게 타들어가는 가을 노을처럼 푸른 하늘을 물들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가을 하늘. 그 아래 울긋불긋 붉게 물든 단풍. 단풍나무 아래에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본다. 햇살을 맞아 반짝거리는 단풍잎이 춤을 추듯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자연이 빚은 총천연색의 불꽃축제. 사진을 보다 보면 울긋불긋한 단풍의 잔상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궁궐을 관리하던 관리인들이 살았던 한옥들. 그들이 거주했던 방의 모습을 둘러보다, 사진으로 담은 풍경. 방 안의 창문 너머로 또 다른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와 위에 반쯤 걸쳐있는 자연의 느낌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눈으로 본 시선과 일치하게 높이를 조정한 뒤,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오행의 방위에 따른 색인 오방색을 활용하여 규칙에 따라 문양을 새기는 모로단청. 화려한 단청의 색깔은 가을의 풍경을 쏙 빼닮았다. 기와 너머엔 나무들이 까치발을 들고 쳐다본다. 장식기와의 잡상 너머로 날아가는 작은 새. 가을이라는 계절 안에서 자연물과 무생물은 하나로 조응한다.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창덕궁을 방문했다. 가을철 화려함을 뽐내던 단청무늬는 흰색 풍경 안에서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색으로 물든 풍경 속에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단청과 기와로 향했다. 장식기와의 잡상 위에도 하얀 눈이 모자를 쓴 것처럼 쌓여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자, 궁궐 안은 점차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두껍게 쌓이기 시작한 눈은 원래의 풍경을 덮고, 겨울나목에 흰색 눈꽃을 피웠다. 함박눈은 조용히 쌓였고, 주위의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흰색 풍경 안에 발자국을 남기며 궁궐 안을 거닐었다. 고개를 돌려 지나간 길을 돌아보자, 두툼한 흰색 솜이불을 덮고 있었다.
뽀드득 거리는 눈을 밟으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창경궁 대온실에 도착했다. 대온실 앞의 소나무들도 대온실 건물처럼 나뭇잎과 가지에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도 하얗게 물들이는 계절. 지붕에 녹은 눈이 덩이째로 떨어지며 이따금씩 적막을 깬다.
강추위가 내려 얼어붙은 창경궁 춘당지. 얼어붙은 호수 위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눈꽃이 핀 나무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구성한다. 눈이 쌓이자, 하늘보다 하얗게 변한 호숫가. 온 세상이 희게 보였다. 모든 것이 멈춘 듯이 보이 공간 속에는 고요가 맺혀 있었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가면 다시 초록으로 물들 계절. 자연스러운 계절의 순환.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찍은 사진들을 한데 모아서 살펴보았다. 같은 장소더라도 계절이 변화하며 장소가 지닌 인상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처럼 장소에 대한 우리의 기억도 사시사철 달라질 것이다. 지나간 계절은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고, 다가올 계절은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