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낡은 노트의 먼지를 털다 — 오래 묵은 기억을 꺼내며
1989년의 노트 한 권,
2025년의 브런치를 통해 드디어 세상에 말을 겁니다.
36년 전, 병상 위에서 적어 내려간 그 마음이
오늘, 조용히 글이 되어 첫 발을 디딥니다.
서랍 깊은 곳,
잊힌 줄 알았던 조그만 상자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 안엔
빛바랜 노트 한 권과
스무 살 무렵의 감정이 눌러앉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1989년 9월 초,
스물한 살의 나는 군에 입대해 이등병 때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원주 군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총 대신,
나는 PX에서 산 싸구려 볼펜과 노트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그날그날,
병상에서 마주한 풍경과 떠오른 기억,
군에 오기 전 사랑했던 사람,
말하지 못한 감정들,
슬며시 내려앉는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시로 써내려 갔습니다.
그 시들은 일기가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정리하려는 시도도,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듯
내 안의 울림을 조용히 눌러 담은 문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그 노트의 먼지를 털고 다시 꺼내듭니다.
그 시절의 나와 마주 앉아
말하지 못했던 말들,
지나온 마음들을
천천히 조립하듯 다시 써보려 합니다.
마치 낡고 해진 구두를 고쳐 신듯,
오래된 마음을 꺼내어 조심스레 꿰매봅니다.
이 글은 잊힌 감정을 수선해
과거의 나를 다시, 천천히 기억하려는 나의 방식입니다.
이 연재는
‘지금의 나’가 ‘그때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너’는
사랑이었을 수도,
친구였을 수도,
혹은 내가 외면했던
내 마음 그 자체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을 조심스레 건드릴 수 있다면,
그 기억 또한 언젠가
누군가를 다시 따뜻하게 꿰매주길 바랍니다.
그때의 나야,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하고 있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시 한 줄 적던 너의 마음이
사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외로웠는지
지금은 알아.
시간이 많이 흘렀지.
마음도 그새 많이 바뀌었지만
그날의 마음만은
지워지지 않더라.
그래서 이렇게,
조금은 천천히,
조심스레 꺼내어 적어본다.
이 글은 오래된 마음의 수선이고,
네가 살아 있었다는 걸 기억하기 위한
나의 방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