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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수학] 우유부단한 사람의 필요에 대해서

선택장애는 양극단의 연결고리, 중성자의 존재처럼

by Oh haoh 오하오

선택장애 싫었으나 인류의 무게중심


다수결의 매정함에 마음이 아프지만


균열 막는 중성자처럼 우리들을 지키네


아무거나, 둘 다, 그냥, 상관없어


예전에는 이런 말들을 쓰는 사람이 싫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지만 바꾸려고 했다. 애매모호하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식어는 보통 안 좋은 뜻으로 쓰인다. 나는 능력은 부족했지만,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모임에서 음식을 정할 때든, 학급에서 놀이를 정할 때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주저 없이 선택했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을 듣고 조율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때로는 ‘둘 다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중국집과 한식집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때, '둘 다 좋다'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결정이든 거부를 하는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학급 놀이 시간을 할 활동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13명이 피구를, 10명이 그림 그리기를 원한다면, 다수결로 피구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다수결은 신속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늘 다수결로만 결정하면,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매번 선택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나는 대안을 고민했다. 변형 피구를 하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규칙으로 변경하거나, 비율에 따라 놀이 시간을 나누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그런데 만약 피구와 그림 둘 다 좋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면? 무엇을 하든 많은 학생이 만족하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는 서로 극단적인 의견만 주장하며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도 빈부 격차가 점점 커지면서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


중간이 사라진 사회는 위기가 왔을 때 대화가 어려워지고, 갈등이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은 중간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사람들은 재미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밸런스 게임을 많이 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둘 다 좋다’는 의견이 더 많은 가치를 가질 때가 있다.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점 개인 맞춤형 정보만을 제공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SNS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려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고, '중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산소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8개인 경우가 많다. 티나지 않는 중성자의 필요성

세상을 만드는 재료인 원자도 비슷하다. 나는 처음엔 원자가 양성자와 전자로만 이루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보이지 않지만 꼭 필요한 중성자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성자는 양성자들의 반발을 줄여 주며 원자핵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원자핵에는 양성자보다 중성자가 더 많다.(같은 경우도 있다.) 그래야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리더에 관심을 가지거나, 뉴스에 나올만한 특별한(대부분은 안 좋은 일이다)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강한 주장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이들, 빛나는 성과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이들이 많다.


중성자가 없다면 부서지고 마는 양성자처럼


우리 사회도 중성자 같은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가끔은 소리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주는 티 나지 않는 그들을 응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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