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세대를 읽고 -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을 가르친 적은 있나?
딸과 함께 지내며 성장하고, 학생을 교육하면서 내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자주성의 부족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그 원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작 우리가 자주성을 길러주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늘 아이를 챙기고, 도와주고, 친절히 안내해 왔다. 그 결과, 아이들은 실패의 경험 없이 자랐다.
아이의 실패는 종종 부모나 교사의 잘못으로 여겨졌고, 책임이 따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이의 실패란, 놀이터에서 넘어지는 일, 지각하는 일, 친구와 다투는 일까지 포함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작은 실패조차 어른의 책임으로 돌린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넘어지면,
“부모는 뭐 했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지시하고, 위험한 곳엔 가지 못하게 한다.
아이가 지각하면,
“왜 깨우지 않았느냐”는 말이 돌아온다.
그래서 부모는 아침마다 깨워주고, 가방과 옷을 챙겨주며, 때로는 밥을 먹여주고 양치질까지 대신해 준다.
아이들이 친구와 다투면,
“왜 갈등을 방치했냐”는 비난이 돌아온다.
그래서 부모는 사소한 다툼의 조짐만 보여도 서둘러 개입해 중재하려 든다.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 사회는 아이의 능력을 부모의 능력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아이의 실패는 곧 부모의 실패가 되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실패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스마트폰의 등장은 치명타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아이들을 식당에서 얌전히 앉아 있게 만들어주었고, 무한한 자극으로 현실 세계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렸다. 스마트폰 덕분에 아이들은 더 이상 (크게 위험하진 않지만) 위험할 수 있는 놀이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안전한 방 안에서 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이 훨씬 더 위험하지만, 우리는 그 위험성을 잘 모른다. 아마 관련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폰은 아이들이 친구들과 몸으로 부딪히는 일도 줄여주었다. 작은 화면 안에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서 더 심각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다툼은 오프라인에서의 충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프라인에서는 우발적인 상황 속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금세 화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과 화해의 과정 속에서 아이는 성장한다. 반면, 온라인에서의 다툼은 빠르게 퍼지고, 힘이 약한 쪽은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는다. 회복도 쉽지 않다. 특히 SNS와 유튜브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더 은밀하다.
SNS에서는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수많은 흥미로운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어려움을 이겨낸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에게도 힘든 순간은 많았지만, 결국 잘 성장해 왔다. 아이들의 성장 가능성은 더욱 크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가 겪는 작은 실패조차 참지 못한다.
넘어지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다투면 화해를 시켜야 하며, 밥을 먹다 흘리면 바로 닦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실패를 미리 차단하려 든다.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개입해, 실패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도, 실패에서 회복하는 힘도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이게 정말 아이를 돕는 걸까?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넘어지도록 허락해야 한다.
지금 학생인 자녀나 조카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그 아이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고 있는가?
도전하고, 넘어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고 있는가?
정말로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