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리는 즐거움
나는 틀리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틀리면 주변 사람들이 좋아한다. 평소에 바른말을 많이 하고 살아서 인지 내가 실수를 할 때면 웃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하하 웃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도 좋아한다. 물론 일부러 실수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다. 실수를 이해한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누군가의 실수를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에게 모두 행복한 일이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무관심(대충)이 아닌 틀리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틀리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특수한 경우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이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열심히 하거나 진실된 사람이 틀렸을 때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한다. 그 사람이 완벽한 사람일 경우에는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가 하루 중에서 언제 웃는지를 돌이켜 보자. 오늘 웃기는 했는가? 가끔 좋은 소식을 들어서 웃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귀여운 실수를 할 때 웃는다. 이것은 비웃는 웃음이 아니다. 그냥 즐거움이다. 말실수를 하거나, 다리가 꼬여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웃는다.
나는 틀리려고 한다. 흠. 그냥 일단 도전해 본다는 뜻이 적절하겠다. 맞으면 좋고, 틀려도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틀리는 것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재미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하면 나는 모른다고 답하지 않는다. 물론 모르는 내용은 솔직하게 잘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 생각이 적절하다면 나로서는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 생각이 틀렸다면 대화를 하는 사람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때로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나는 틀리는 것과 대충 하거나 무관심한 것을 구분하고자 한다.
2+3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보자. 답을 6이라고 한다면 나는 매우 기쁘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배우면 발전 가능성이 있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2+3=추석이라고 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똑같이 답을 틀렸지만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답을 하는 사람은 배움의 여지가 없다. 그냥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 이런 사람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논을 하지만, 정작 다른 문제 때문에 다투고 있거나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특히 더 자주 드러난다. 유튜브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서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관심사도 다양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대화에 참여하고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언제 말해야 할지 타이밍을 찾고 있는 경우가 있다.
틀리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