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0년의 경력, 0의 일상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며 마주한 '나'라는 비즈니스 모델

by haoinana

​지난 10년 동안 나의 하루는 '구조화' 그 자체였다. 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확인하는 지표들, 회의실 화이트보드 가득 채워지던 거창한 로직 모델, 그리고 누군가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밤새 다듬었던 장밋빛 IR 자료들. 나의 언어는 언제나 '시장 점유율', '수익 모델', '지속 가능한 성장' 같은 단어들로 무장되어 있었다. 타인의 비즈니스를 정교하게 설계해 주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숫자로 증명해 내는 것이 나의 업이었고 자부심이었다.


​1월의 어느 오후, 10년간 익숙했던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며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비즈니스 모델' 하나를 마주했다. 바로 '나'라는 모델이었다.

​박스 하나에 담기는 인생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손때 묻은 다이어리 몇 권, 법인카드가 꽂혀 있던 명함 지갑, 그리고 모니터 옆을 지키던 작은 다육 식물. 그 박스를 들고 회사를 나서는 순간, 나를 수식하던 화려한 타이틀들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모든 껍데기를 떼어내고 나니 남은 것은 오로지 숫자 '0'뿐이었다.


​기획자로서 나는 늘 '제로 베이스(Zero-base)' 사고를 강조해 왔다. 기존의 관습을 버리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검토하라는 그 주문이, 정작 내 삶에 닥치자 공포로 다가왔다. 다음 달 입금될 급여가 없고,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은 자유라기보다 '정지'에 가까웠다.


​집으로 돌아와 텅 빈 거실에 앉아 있는데,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는 남의 비즈니스는 그렇게 잘 설계해 주면서, 왜 내 인생이라는 모델은 이토록 취약하게 방치했을까?"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보았다. 자산 항목에는 10년의 노련함과 몇 장의 자격증이 있었지만, 부채 항목에는 보이지 않는 번아웃과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가득했다. 손익계산서를 따져보니, 타인의 성장을 위해 내 시간을 소모하며 얻은 '당기순이익'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결함은 '리스크 관리' 부재였다. 회사가 곧 나였고, 업무가 곧 일상이었던 내게 '회사 밖의 삶'이라는 변수는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0'의 무게에 짓눌려 지내던 중,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베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울음소리. 길 위에서 떨고 있던 고등어 무늬의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적막한 일상에 침입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보자면 이 고양이는 '최악의 투자처'였다. 수익 모델은 전혀 없는데 관리 비용(사료, 병원비)은 계속해서 발생하며, 내 휴식 시간을 무차별적으로 점유하는 존재. 하지만 묘하게도 그 작은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엑셀 시트 밖의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이 내 거실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기획서를 쓴다. 이번 클라이언트는 내가 아닌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기획서에는 연간 매출 목표 대신 '하루에 한 번 고양이와 눈 맞추기' 같은 항목이 들어간다. '시장 점유율' 대신 '내 마음의 평화 점유율'을 따져본다.


​10년의 경력이 나에게 준 것은 비단 기획 테크닉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실패와 수정을 거듭하며 결국 최선의 안을 찾아냈던 그 끈기가, 이제 '0'에서 시작하는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비록 지금은 매출도 없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수익성 제로'의 상태이지만, 나는 이 '나'라는 모델이 꽤 흥미롭다. 세상에 없던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고되겠지만, 그만큼 근사한 결론에 도달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며 가져온 박스는 아직 거실 한구석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이제 엑셀 시트의 칸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그 칸을 지우고 나만의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진짜 '작가'가 되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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