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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세영 Jan 12. 2021

내 안에 작은 아이

좌절감, 무력감, 취약함


내 안에 들끓는 분노를 마주한 날이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정리해보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은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다. 어젯밤 12시가 넘어서 자고, 잠이 안 깨지니 일어나면서부터 짜증을 냈다. 그때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다. 줌 수업을 듣기 위해 누워서 태블릿 피시를 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아서 들으라고 하니 짜증을 내면서 간신히 일어선다.


둘이서 꼭 붙어 앉아서 네가 쳤네. 아니 네가 먼저 쳤네. 하면서 쌍둥이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런 된장!) 아침부터 전쟁이다. (아침엔 제발 평화롭게 시작했으면) 부화가 치밀었다. 한 명씩 방과 거실로 나누어 수업을 듣게 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아이가 이불에 누워서 화면을 끄고 듣고 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의 모습과 수업을 받고 있는 반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 앉아서 의젓하게 수업을 듣고, 발표하는 모습들을 보자 화면을 끄고 누워있는 우리 아이가 모질이 밉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선생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길래 좀 보여달라고 했다가 아이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게 됐다.


아! 오늘 아침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이제 11살이 된 아이가 엄마 말에 꼬박꼬박 대든다.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완전히 덫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아이들끼리 말싸움하듯이 완전히 초등학생 같은 말다툼이 되었다. 아이에게도 화가 났고,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아이의 수업태도가 걱정되고, 여러 가지 근심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한 동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이와 떨어져 혼자 있을 때 느닷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 감정과 눈물이 너무 강렬하고 서러웠기 때문이다. 이 복받쳐 오르는 혼란스러운 감정은 뭘까. 처음엔 수업에 임하는 아이의 태도가 걱정스러웠고, 엄마로서 뭔가 잘못했구나라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더 중요한 뭔가가 있었다. 뭐가 그렇게 나를 흔들었을까. 내 안에 무엇이 그렇게 휘져어졌을까.


그건 뜻밖에도 미움과 원망의 감정이었다. 아이가 아닌 내 안에 상처 받은 감정이었다. 내 안에 작은 아이가 아빠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가슴을 치면서 울고 있었다. 아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에는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했다고 느끼며 화가 나 있었다.





아이와의 부딪침을 통해서 내 안에 이슈를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드러나는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아픈 감정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몇 가지 떠올랐다. 내가 나의 경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을 때마다 내 안에 속 사람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화가 났었다. 아이에게 무시당했다고 느꼈던 나의 속 사람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취약함이 드러난 내 마음을 한동안 보듬어주었다. 치솟았던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뒤죽박죽 엉켜있던 감정들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배우려 했던 것일까. 어린 시절 착한 아이였던 나는 나의 감정과 욕구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감정적이고 이따금씩 폭발하는 아빠가 너무 무서웠었다. 아빠의 폭발에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던 나.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자애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 갈등을 회피하려고 하는 내가 있었다.


부모가 화를 내지 않고, 조화로우면 아이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화를 내지 않으니 아이가 화를 낸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감정을 심하게 폭발하는 경우에 나는 어린 시절 아빠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부모로서의 주도권을 상당 부분 넘겨준 채로 아이들이 알아서 존중해주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내 안에 존중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었다. 내 안에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아이가 있었다. 내 안에 취약한 이 아이들은 내가 돌보고 지켜주며 키워 나아갈 나의 소중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아이를 키우며 내 안에 아이도 같이 키운다.




아이들도 행복하고, 엄마도 행복하게 함께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민주적 대화를 많이 해나가야 할 것이다. 갈등하고 부딪치면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고, 더없이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과 솔직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을 점점 더 진솔하게 나눌 수 있기를~ 아이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좀 더 어른다운 내가 되어가기를...


어린 시절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품은 채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 살아간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은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 있으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전달하며 살아가게 된다.

존 브래드쇼, <상처받은 내면아이치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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