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여섯 살 무렵, 네 삶 속에는 산동네의 모험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풍경이 스며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에 가장 흔한 이름일지도 모를 '연세유치원'이었다.
네 어머니는 다섯 남매 중 첫째 딸로,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과 생계의 무게를 짊어진 분이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한 아쉬움은 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고, 그래서인지 너에게만큼은 꼭 다른 세상을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원복을 맞춰입고, 대단해 보이던 연세유치원에 너를 보내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처럼 유치원 지원금이나 복지 제도가 없던 시절, 유치원을 다닌다는 건 곧 “그 집은 좀 사는 집이네”라는 평가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흙먼지 가득한 산동네 꼭대기에서 연세유치원 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너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 안에는 '내 딸 만큼은 꿈을 제한 없이 펼치게 하고 싶다’는 깊은 사랑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연세유치원의 원복은 까만 원피스에 하얀 목폴라, 그리고 해바라기처럼 밝은 노란 모자였다. 그 옷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 있을 때면, 평소 산동네를 뛰어다니던 개구쟁이가 아니라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복 차림으로 단체 사진을 찍던 날, 네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가득했지만, 옷이 주는 자부심 덕분인지 자세만큼은 또래보다 당당해 보였다.
교실 안에서 색종이를 오리고 풀칠하며 작은 작품을 만들던 기억, 피아노 반주에 맞춰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던 순간들은 반짝이는 기억 조각으로 남았다. 그 모든 순간은 네 어린 마음에 “나는 특별하다”는 작은 씨앗을 심어 주었다.
유치원 시절, 특히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두 명의 남자아이였다.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한 명은 네가 좋아하던 아이였고, 또 한 명은 너를 좋아해 주던 아이였다. 어린 마음에 복잡한 감정은 알 수 없었지만, 셋이 함께 찍힌 사진 속에선 너희 모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짧은 시간의 작은 삼각구도였지만, 그 속에서 너는 사람 사이의 미묘한 마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여자아이들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웃음소리와 장난으로 가득 찼던 기억의 배경에는 늘 그 두 남자아이가 있었다.
유치원에서 소풍을 갔던 날도 선명하다. 지금의 에버랜드인 용인 자연농원. 그곳에서 네가 잔디에 앉아 웃고 있고, 그 옆에는 바퀴 달린 갈색 목마를 타고 햇빛이 눈부셔 찡그리며 웃고 있는 동생 민혁이와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는 어머니까지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있다. 그 사진을 보면, 유치원 시절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정말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가을쯤, 또 다시 찾아온 전세계약 만료로 인해 이사 때문에 연세유치원 생활은 7개월 만에 끝나버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보낸 경험은 너에게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훗날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을 때, 이름이 ‘연세 피아노’였던 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마치 그 유치원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 어린 너의 기억 속에 ‘연세’라는 이름은 하나의 꿈과도 같은 기호가 되어 있었다.
네가 연세유치원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바람이 함께 담겨 있다. 까만 원피스와 노란 모자를 쓰고 율동을 하던 네 모습은 단순히 네 자부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잘할 수 있음에도 환경때문에 배움의 끝을 보지 못한 한 여인의 꿈이, 딸의 어깨 위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린 너는 몰랐지만, 그 곳은 어머니와 너, 두 사람의 자부심이 포개져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살다보니, 작은 네가 어느새... 유치원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