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은 때론 비수가 되었다

Episode 29

by 현서린


미술학원에 들어서면, 너는 조금 달라졌다. 연필을 쥐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고,
캔버스 앞에서는 말수가 줄어드는 대신 확신이 생겼다. 여기서는 네가 꽤 잘 그리는 아이였다.

선이 흔들리지 않았고, 형태를 잡는 눈도 정확했다. 결국은 전국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너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충분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여학교에 다니던 너는 학교 밖에서는 이상하게도 남자아이들과 더 편하게 지냈다.
교회에서도 그랬고, 미술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고, 말을 고르지 않아도 대화가 흘러갔다. 그 중에서도 정한서는 특별히 더 편한 친구였다. 아마도 매일을 함께 했던 친구였으니까.

키가 크고, 잘생겼고, 유머러스 했다. 농담을 늘 다큐로 받는 영서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무엇보다 대화의 속도가 비슷해서 척하면 척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대화를 이어갔다.

둘은 순수하게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했다. 그 당시 인기 있던 남성 듀오 ‘더 블루’의 노래를, 김민종과 손지창처럼 나눠 불렀다. 화음이 맞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었지만, 둘은 함께할 수 있었다. 영서는 기본적으로 여자 가수 노래를 못 부른다. 그 이유로 합창단에서도 나왔던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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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학원에 많다는 걸 너는 몰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너의 행동을 바꾸는 이유가 되지 못했다. 한서는 남자친구가 아니었고, 너에게 그는 그저 말이 잘 통하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여자아이들의 눈에는 그게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인기 많은 아이 옆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너는 설명하기 쉬운 적이 되었을 테니까.

그런 일은 처음도 아니었다.

너는 익숙한 쪽을 택했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굳이 오해를 풀지도, 다르게 보이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학원에 선배 두명이 들어왔다. 김진우, 유한결이라는 21살의 오빠들이었다고 한다.

한결오빠는 성격이 엄청 유쾌했다. 너무 웃겨서 개그맨 인줄 알았다. 영서를 가르치던 제갈쌤의 후배들인데, 쌤을 따라서 학원을 옮겨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림 실력들이 출중하다는 말에 뒤에서 뎃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처음 본 순간, 너는 단번에 알았다. 아, 이 사람은 나보다 잘 그린다. 아니.. 내가 이제껏 본 사람중에 제일 잘 그린다. 날 가르치는 제갈쌤보다도 잘 그린다. 근데 그냥 잘 그리는게 아니라, 느낌이 다르다. 그림이 탐난다. 이 사람이 탐난다. 김진우...

그림 앞에 서 있는 그의 손은 망설임이 없었고, 명암을 쌓는 방식도 달랐다.
그림은 말이 없었지만,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은 설렘보다는 존경에 가까웠다.

그때까지도 너는 여전히 건욱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늘 냉랭했고, 너를 한 번도 여자로 보지 않았던 아이. 슬리퍼를 벗어서 때릴 정도로 막 대하던 아이.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저 네 안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

교회수련회에서 너 없이 찬양팀이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 순간에도 넌 건욱이와 현섭이, 준우와 준현이를 사진에 담았다. 너의 빈자리에 선 새로운 여자 보컬은 찬양팀의 그 여선생님이 뽑은 아이였다.


그래서 네가 느낀 진우 오빠에 대한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같이 그림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오빠는 삼수를 하고 있었고, 대학이라는 문 앞에서 계속 멈춰 서 있는 사람이었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자주 접는 사람이기도 했었다. 너보다도 작은 키는 그에게 늘 설명되지 않는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너는 그런 걸 깊이 계산하지 못했다.

아니, 계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너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빠가 좋아요. 옆에서 같이 그려도 되요?”

그 말은 너에게는 솔직함이었지만, 오빠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친해지고 싶다는 말과 좋아한다는 말 사이의 간격을 너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오빠는 조금씩 너를 피했다. 눈이 마주쳐도 말을 걸지 않았고, 같은 공간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설명은 없었고, 이유도 들을 수 없었다. 인사는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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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너는 알았다. 네 말이 원하던 방향으로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친구들은 말했다. 너무 솔직하지 말라고. 조금은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면 늘 네가 마음을 다친다고... 특히 한서는 그런 너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너는 그걸 쉽게 고치지 못했다.

좋으면 좋다고 말했고, 싫으면 싫다고 말해버리는 성격은 이미 네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또 한 번 상처를 받았고, 그리고 또 한 번 배웠다.
세상에서는 솔직함이 언제나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도 너는 그림을 그렸고,

미술학원에 나갔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지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조용히 남는 감각이 있었다.

솔직함은,
때론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

너는 그 사실을 아주 이른 나이에 몸으로 먼저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순간 느끼는 감정을 쉽게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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