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성별, 직업은 잠시 물 밖에 두고 오세요.
수영장을 다니다 보면 매달 사람들이 드고 나지만 오래 다니다 보면 눈에 익은 사람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어느덧 8개월 차가 된 수영 고인물이기 때문에 같은 레인에서 수업을 듣는 고인물들끼리는 서로 알아본다. 수영장이라는 공간 특성상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같은 수업을 계속 듣게 되면 남 모를 동지애가 싹트기도 한다.
속도가 느려 수업을 듣는 다른 분들께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항상 뒤편으로 가는 편인데, 항상 그런 나보다 더 뒤에 서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우리는 꼬리칸에 서서 인사도 하게 되고, 내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께서 조언을 해주시도 했다. 들어보니 할아버지께서는 5년이 넘게 수영을 하셨고, 이미 양팔접영까지 섭렵하신 고수지만 무릎이 안 좋으셔서 중급반의 꼬리칸을 고수하고 계신 거였다. 처음에 조언을 주실 때는 훈수를 두시는 건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방법으로 평영 자세를 바꾼 순간 속도가 붙어 쭉쭉 나가는 것을 경험하고 이제는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수영장을 다니면서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고 싶었는데 그런 관계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일주일째 수영장에 안 나오셔서 걱정을 했는데, 그 다음 주에 여쭤보니 여름휴가를 다녀오신 거였더라. 아프신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대문자 I인 내게 새로 사귄 수친은 소중하다. 매일 같이 보던 할아버지가 안 나오시면 이 수업도 뭔가 심심할 것 같았기 때문에. 또 한날은 내가 몸이 안 좋아 수영장을 못 갔는데 할아버지께서 다음 시간에 왜 안 왔냐며 물어봐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안 나오면 서로 걱정하고 서로 출석체크도 하기도 한다.
지난달부터는 옆 레인에서 한 우리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가 오셨는데 항상 밝은 모습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에 임하신다. 귀여운 꽃자수의 수영복을 입으시고 열심히 헤엄치느라 상기된 얼굴로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시는데, 나이를 넘어 순수하게 같은 학생의 입장이 된 것 같아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잠깐씩 쉬는 시간에 수영이 재밌다며 수다도 떨기도 하고, 지금 배우고 있는 접영을 할 때엔 서로 응원을 해준다.
주말에 수영장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학생도 있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인사를 하게 되고 이야기도 나누게 됐다. 또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었다. (또래였길 바란 내가 양심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중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대화 주제가 바뀌지도 않는다. 대화의 중심에는 항상 수영이 있을 뿐이다. 수영할 때 어떤 게 안 되더라, 이렇게 하면 잘된다, 수영을 배우고 호캉스를 다녀왔다던지 기-승-전-수영으로 대화를 하곤 한다.
수영장에서의 우정이 좋은 이유는 수영얘기 말고 다른 사적인 얘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디서, 누구든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이름이나 나이, 직장 이런 것들은 수영장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단지 수영을 얼마나 배웠는지, 어떤 영법까지 배웠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곳에서는 수영이란 공통점으로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와도, 엄마뻘의 아주머니와도, 동생 같은 학생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나이도, 일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수영을 배우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