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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회상

쓸모라는 말

by 해피미니

몇일전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누군가 보낸 사연에서 시작된 말이었던 것 같은데, '여러분도 쓸모없는 일도 하면서 살아보아라' 라는 내용으로 정리되는 내용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날 난 그 '쓸모'라는 단어에 단단히 꽂혔다.

너무 쓸모있는 일만 하면서 빡빡하게 살지 말고 쓸모는 없지만 자신의 기쁨을 위한 쓸데없는 일도 하면서 살자는 그날의 내용은 전혀 반박할 필요도 없는 맞는 말이었는데, 왜 난 몇날 몇일을 그 단어에 몰입된 걸까. 내 감정을 정리해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약간 어깃장을 놓고 싶은 심정이랄까. 말하자면, "아니, 근데... ...,"로 시작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맘이 가득 들었다.


'쓸모없는 놈!'

'애는 쓸만해'

'쓸데없이!'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서 이런 문장을 많이 본 것도 같다. 쓸모가 없다는 것은 굉장한 욕인 모양이다. 또, 쓸만하다는 것은 꽤 그럴싸한 칭찬이고, 쓸데없는 짓이란 정말 부정적인 행위인 것도 같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쓸모있기'위해 꽤 노력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도 스스로에게 허용해주자는 그 말은 필요한, '쓸모있는 말'인 것 같다.


식민지에 전쟁에 독재시대까지 먹고 살기도 쉽지 않았던 우리 윗세대에겐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생존여부였을 것 같다. 그래서 그게 우리 언어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는 6.25때 중1이었는데, 나무를 줏어서 뚝딱뚝딱 구두닦이 틀을 만드는 중3 사촌형을 따라서 자기도 하나 만들어 등에 매고는 미군아저씨 차를 얻어타고 구두닦으러 길을 나섰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형을 따라 나섰다고 했다. 전쟁이 나면 아이들도 제몫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바짝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 전까지 인사동 99칸 부잣집 장손자로 드시니 납시니 했다던데, 아버지는 전쟁통에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에다 동생이 셋이나 달린 장남이 된 아버지는 어린 가장노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신문도 팔아보고 군인 심부름도 해보고 했다던데 성격이 내성적이고 뭘 해본 적이 없어서 쭈뼛거리곤 했는데 그나마 그 사촌형 덕에 용기를 내서 나섰었다고 했었다. 그 시절 분들이 그렇게 '쓸모있으려고', '쓸만하려고', '쓸데없는 짓' 않고 살아주신 덕에 우리가 이만큼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하면 난 쓸모없는 일도 비교적 실컷하면서 자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힘든 줄만 알았지만 말이다. 요즘아이들에 비하면 내가 자라나던 80-90년대가 괜찮은 시절이었던 것도 같다. 한국은 가난을 벗어나 제법 자존감을 조금 내새워도 될만큼 커져가고 있었고, 오늘보다 내일이 보다 희망이 있어 보이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만 열심히 살면 좋은 때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아주 조금은 지금보다 더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대학이라는 것도 모두가 가던 때가 아니고, 학력고사 공부란 게 1년만 죽어라 하면 전과 다른 결과로 대학을 갈 수도 있던 때였으니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좀 방황도 하고 휘청휘청 딴짓도 해도 인생에 큰 흠이 나진 않았다. 그 덕에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이 영화감독도 되고 작가도 되고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너무나도 운이 좋게 나는 사춘기를 실컷 만끽해도 되는 시절을 살았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매일매일을 잘 살아야하고 그걸 증거로 남겨야하고 친구들과 비교해서 줄을 세워 등급을 나눠서 3년 6년을 실수없이 살아야 모두가 꿈꾸는 한가지 길. 대학을 가는 세상에 산다는 게 참 가엾고 미안하다. 옆으로 빠지는 이야기지만, 난 늦되는 아이도 따라잡을 기회를 얻고, 그야말로 쓸데없는 일에 깊이 빠져도 보고, 딴청을 부려본 경험도 해보게 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어른들에게 '쓸모있어야 하는 것'은 의심해볼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면 우리 세대에겐 '쓸모 있고 싶은 것'이 나의 의지나 성장같은 느낌이 있었고, 요즘 청년, 소년들에게는 '내가 얼마나 쓸모있는지' 당신에게 증명해드리겠다는 인증서류 같아진 것 같다. 절박해보인다. 그래서 딱하다.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그 '쓸모'에서 떨어져 나간 청년들도 많이 생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게 보니 '쓸모'란 단어가 좀 몹쓸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 단어에 대해 편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쓸모있게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나 좋기를 좀 내려놓고 여러모로 쓸모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편들어 주고 싶다. 나는 별 쳐다보고 노래부르고 시쓴다고 끄적거리던 '쓸모없는 시간' 속의 나도 좋았지만, 정말 힘들었지만 세아이의 엄마로 지냈던 '쓸모있던 시간' 속의 나도 좋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쓸모없이 놀던 베짱이는 겨울이 오면 버려진다. 그건 옛버전의 이야기이고 요즘 꺼꾸로 써진 이야기에서는 베짱이는 먹을 것은 많아도 지루한 겨울을 나는 개미에게 자신이 보았던 여름 햇살과 무지개, 꽃과 산들바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서 쓸모있는 겨울을 보낸다. 쓸모란 그런 것인 것 같다. 당장에 필요없는 일인 것도 언제 필요한 일이 될 지도 모르고, 파도를 타고 잘 쉬고 온 휴일은 지루한 주중을 견디게 할 힘이 되니 그것도 쓸모있는 일인 것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자. 되도록이면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가끔은 당장 쓸모없어도 괜찮다. 그게 언제 쓸모있는 일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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