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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Jul 13. 2018

행복의 유통기한을 늘릴 수 있을까

28. 데드라인(Deadline), 끝에서 바라보는 행복의 선

"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우리를 스치는 바람이 누군가의 숨결임을 깨달을 때, 무한의 거리는 유한하다."



    생사의 갈림길엔 건조한 공기가 드리웠다. 병상의 일정한 소리는 불규칙한 고동으로 바뀌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박동을 할아버지께 이식하고 싶었다. 허나, 내 숨결은 생명의 종결을 막지 못했다. 부재의 공간은 덮을수록 깊어졌다. 깊게 베인 슬픔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내가 할 수 있던 건 시시각각 변하는 맥박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숫자가 곧 생명력이었던 것이다. 


    계량화된 생명. 장례식장의 배려 덕분에 고인을 보내는 그 순간까지도 유족은 숫자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음료수 캔의 숫자를 세며 비용을 계산한다. 상, 중, 하로 나뉜 관의 등급을 보며 내 인생은 몇 등급일지 생각해본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의 멈춤에서 글을 써낸다. 잃거나 잊혀질 기억을 붙잡기 위해, 죽음 앞에서 삶을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죽을 것이기 때문에…

 


1.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친한 친구는 외로움을 느낄 때 가장 불행하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언젠가는 우리가 맞이해야 할 숙명. 그것이 물리적 이별이든, 사랑의 감정이 식은 것이든 간에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오직 변치 않는 사실은 모두가 변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맞닥뜨릴 이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당연한 말이라서, 당연한 듯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중세 종교인은 죽음을 관조(Reflection)함으로써 삶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지금과 사뭇 달랐다. 종교인들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불멸의 영혼을 기르고자 수양했다. 내세는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역설적으로 현재를 죽였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현재에 적용한다. "Get the most out of life".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며 사는 게 현대인의 삶의 미덕처럼 보이는 게 요즘이다.


2. Birth Life is BCD, 인생은 선택의 연속

     사르트르의 말처럼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다. BIRTH - CHOICE - DEATH. 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만 할까? 그건 인간이 한정된 자원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돈, 수명 등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유한함은 곧 끝이 있음을 의미한다. Finite와 Finish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함이 곧 끝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선택은 결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을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은 마침표보다는 쉼표에 가깝다. 선택은 맺음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기에 인간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삶은 이정표 없이 표류하는 듯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하는 순간만큼은, Death는 Destination으로 바뀐다.


"What would you do if die tomorrow?"


    위 질문에 대답한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변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위 고민을 행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데드라인을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3. Deadline, 넘어가면 죽는 선

   Deadline의 유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국 교도소에서 선을 넘어가면 총살을 당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용어가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끝이 있어야 일을 시작하고, 동기부여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Visualize the future". 동기부여의 핵심이다. 필자가 태권도 선수부 시절 가장 싫어하던 체력훈련이 있었는데, 그건 언제 호각을 불지 모르는 달리기 트레이닝이었다. 농구 코트 끝에서 반대쪽으로 달리다가 호각이 불리면, 방향을 바꾼다. 어느 순간 지쳐 스피드가 느려지면, 코치는 호각을 불지 않고 계속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른 채, 끝과 끝을 오가는 것만큼 힘든 훈련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를 세울 때는 반드시 기한을 정해야 한다. Tim Urban의 TED 강연 <Inside the mind of a master procrastinator>에 따르면, 우리에게 미칠 피해나, 공개적 망신 등이 '쉽고 재미있는 것만 하려는 뇌의 특정 영역'에 두려움을 줄 때, 질질 끄는 습관(Procrastination)이 약해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데드라인이 없는 자영업, 예술, 관계와 같은 것들에 데드라인 설정을 추천한다. 막연하고 끝없는 고민은 지속적인 후회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끝이 있어야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And it's this long-term kind of procrastination that's much less visible and much less talked about than the funnier, short-term deadline-based kind. It's usually suffered quietly and privately. And it can be the source of a huge amount of long-term unhappiness, and regrets."



    이번 글에서는 행복을 바라보는 시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보통 현재 시점에서 기대가 반영된 미래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은 인생을 끝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삶의 종류는 전 세계 사람의 수만큼 많지만 그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형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건 희극일까 비극일까?  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생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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