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현실에 기대거나 미래를 기대하거나, 한국과 덴마크의 취업 이야기
자기소개서의 흔한 질문 중 하나다. 최종 면접까지 갔던 회사의 질문이기도 했다. 대답을 하기 앞서, 면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질문에 덤벼들지 않는 것'이다. 묻는 말에 간결하고 적확하게 답하는 것이 최고다. 다만,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에는 나름의 전략이 필요하다. 문제를 '재정의'하는 것이다. 당시 내 답변은 이랬다.
"저는 실패를 '실력 있는 패기'로 정의합니다. 즉 제게 실패는 인생에서 가장 큰 교훈을 준 시기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내 답변이 진부해 보일 수 있겠으나, 대학생 수준에서의 실패 경험이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고, 질문의 의도가 '극복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답변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서두에서 '재정의'를 하는 게 중요하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후, 내가 마주한 현실을 재정의하고, 교훈을 얻고, 재도약을 위한 통과의례라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과정은 괴롭다. 실망은 감정의 그물망을 타고 절망이 되었고, 절규에 가까운 외침엔 분노가 있었다. 기대의 대가는 또 다른 대기다. 결과 발표날에 오르내리는 실시간 검색어에 난 또다시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감정의 파고는 불안이 나를 파고들수록 높아져만 갔다.
불안은 대개 결핍에서 비롯된다. 기대와 현실의 간극엔 행복 대신 불안이 채워진다. 이런 연유로 덴마크의 높은 행복 비결을 ‘현실 만족에 따른 미래에 대한 낮은 기대감’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로 덴마크인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낮을까? 영어 단어 Expect는 ex(out) + (s)pect(보다)의 합성어다. 즉, 갖지 못한 것을 보는 게 기대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덴마크는 선진 복지 국가이지만, 이러한 상태가 반드시 ‘낮은 기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사실은 국경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덴마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건 기대보다 성취가 현실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최근 덴마크의 사회 문제 중 하나가 고급 인력 이탈 현상이다. 덴마크인이라면 대학 무상 교육은 물론, 한 달에 100만 원이 넘는 용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닌다. 문제는 국가 세금으로 교육한 고급 인재들이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으로 점점 떠난다. 성취와 성장을 위한 기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오르후스 해변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혼자 돗자리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여성과 행복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을 데이터 분석가이자, 현재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쉬고 있는 상태라고 소개했다. (참고로, 덴마크는 노동유연성이 높고, 실업급여 제도가 잘 갖춰 있어, 유연안정성이 높은 나라로 꼽힌다.)
그녀에게 "실업 상태인 게 불안하지는 않아?"라고 물었더니 답변이 예술이었다. "실업 상태를 'Between Jobs'라고 표현하잖아? 난 지금 그 사이에 있는 것이고, 삶도 돌아보고 있는 시간이 생겼기에 불안하지는 않아." 당시엔 이때의 인터뷰가 별로 인상 깊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에서 실업자로의 신분 전환이 임박하자,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1) From Expect To Respect
Respect는 Re(다시)+Spect(보다)의 합성어다. 즉, '존경'에는 '되돌아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덴마크인들의 기대에는 존중이 있었다. 자기 존중. 취업 준비를 할 때 나를 돌아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손은 움직이는데, 글자 수가 늘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자신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회사 맞춤형 모습을 선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취업을 위해서는 직장인이 되겠다는 기대보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입사를 하면, 입사 후 1년 이내에 퇴사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2) Escape Expectation Trap
자기 존중은 흔히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자존감과 자존심. 자존심은 타인의 시선을 반영하지만, 자기 존중을 위한 방어기제의 성격이 짙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자존심 내세울 일은 드물고 자존감이 낮아질 일은 많다. 괜찮다. 오히려 문제는 자존감이 높은 경우다. 기준치를 넘은 자존감은 곧 장밋빛 기대와 전망으로 바뀐다. 채용 프로세스를 하나씩 '합격'이라는 단어로 지워나갈 때마다 자신감이 생긴다. 면접 사전 과제 중 10년 후 나의 모습을 묻는 'Career Path'에는 이미 회사로 들어가는 레드카펫이 깔린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희망을 품는 것은 좋다. 다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결과'가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3) Self-objectification for Self-realization
필자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도 믿지 않는다. 상황을 믿을 뿐이다. 결국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장단점'은 취업 문항의 단골손님인데, 나는 주로 '긴장하지 않는 성격'을 장점으로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다. 다만, 당일에 긴장 하지 않을 뿐이다. 원리는 이렇다. 디데이가 오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긴장을 하면서 준비한다. 그래서 당일에는 긴장하지 않도록 모든 불안감을 소진해버리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계속 실전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의 면접을 혼자 준비하는 경우, 방에 거울을 놓고, 면접 볼 때 입을 옷을 갖추고, 예상 질문들을 핸드폰에 녹음해놓고, 답변하는 방식으로 연습한다. 첫 답변에 따라 나올 질문들을 예상한다. 케이스를 나눈다.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지,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잊지 말자. 필자는 2018년 상반기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글의 가치는 타산지석과 반면교사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실패했을까. 왜 2곳의 대기업에서 동시에 최종면접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았을까.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그 원인을 밖에서 찾고 싶지 않다. 자기합리화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객관화이기 때문이다.
- Not Differentiation But Demonstration
최종 면접에서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차별화에 대한 강박이었다. 최종 면접은 보통 임원 면접이다. 이때 면접관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유능함보다는 구성원으로서의 면모였다. 회사의 부품이 된다는 자조적인 생각은 필요 없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자. 만약 기업을 운영한다면, 누구를 뽑을 것인가? 서류, 인적성, 실무진 면접에서 이미 실력은 확인했다. 따라서, 최종 면접에서 보여야 하는 모습은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왜 차별화에 집착했는가? 최악의 고용지표에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나는 다르다며 스스로를 다스렸지만, 내면엔 돋보이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면접은 결국 대화인데, 난 경쟁에 더 많은 신경을 썼었다. 취업은 경쟁이지만 역설적으로, 경쟁심을 버리고 '회사에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면접을 볼 필요가 있다. 정답은 없다. 그래도 추측해본다. 그러면서 나만의 정답도 만들어 본다. 서로의 답지가 같다면, 언젠가 내게 맞는 직업과 직장을 찾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취업에 실패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을까? 질문이 아니었다. 내겐 최면이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아도 좋다. 행복에도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실패 경험을 통해 도움을 얻었다면 이 글은 행복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