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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Oct 25. 2021

일의 기쁨과 슬픔 그 사이의 휴가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 좋은 삶에 대한 욕심


새소리와 햇빛 속 나뭇잎에 숨어 그늘과 빛의 적절한 조화 속 공원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편다.

#2021.10.25. 2:22

언터쳐블 노조의 창립기념일로 덩달아 쉬고 있다.  회사 노조는 만인의 욕받이 대상이지만, 그렇지 않은 노조가 과연 있기는 할까 싶다가도, 노조에 소속되지는 않으나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이런 아이러니함 속에서 인생의 역설을 생각한다. 외부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속된 내부인이 아닌 '대졸 사무 정규직'이라는 어정쩡한 위치는 서울에서의 회사 그것만큼이나 어색하다.  


주말을 쉬고 월요일까지 쉬니까 참으로 쉰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물론, 자발적으로 쉬었을 때만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은 일을 하기 싫어하는데,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면 온갖 스트레스와 몸의 피로로 몸져누워 어렵게 번 돈을 다시 병원비로 쓰거나, 일상을 굴리기 위해 함께한 자동차를 굴리는 데 돈이 들어갈 때면 참으로 아까울 수가 없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 인생은 어느 쪽으로든 굴러가고 있는데 그 굴러감이 나로 인한 것인지 세상의 중력 때문인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은 맞는지, 온통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의 사건 사고 소식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현실에 적응해나가는 나 자신이야말로 반쯤 미친놈은 아닌지,  적응하는 놈이 강한 놈이라며 스스로 채찍질하지만, 결국 그 채찍질이 타인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선이 되어 나의 선(善)이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는 모순 속에서 생각이 생각을 물어올 때면 숲 속을 찾게 된다.


물론 그 숲이라는 것도 이제는 '숲세권'이라는 아파트 마케팅 용어로 익숙하게 쓰이면서, 그 무엇 하나 상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음을 한탄하며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상업화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아이러니에서 한때나마 존재했던 아이 같은 순수함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느낌은 마치,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며 발끝부터 약동하는 자연의 즐거움을 느끼다가도 작가의 [밥벌이의 지겨움]이 동시에 생각나다가 결국엔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떠올리며 제목 끝말잇기를 하다가 '도대체 사는 게 뭘까' 하는 답 없는 질문으로 끝나는 답이야 말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의 세계를 지키는 것이 오리지널리티를 갖는 것이라 여겼음에도, 영화 뷰티풀 마인드처럼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다가 미쳐버리는 것은 아닌지(물론 천재 수학자 존 내쉬는 '내쉬 균형'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협상 이론에 기여했지만) 나의 오리지널리티, 또는 편견과 고집, 자기주장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누군가를 위한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지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냐며 반대쪽에서 들리는 야누스적 자아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나온 이 순간까지도 자취를 감추지 못한다.


누군가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고군분투하고 동시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금방 일을 그만두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본다. 요즘 말로는 '파이어족'이라고 하는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불꽃같은 단어로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데, 머리로 생각할 때는 그 길의 끝에는 '꽃'이 있는 꽃길일 것 같지만 막상 가보니 '불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다소 보수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 본디 그 길이라는 것은 하나의 길이었어서 한 사람이 나가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로 들어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는데, 이제는 세상이 변하여 주문 접수는 키오스크가, 광고는 가상의 모델이, 생산은 고관절이 멀쩡한 로봇들이 대체하려 하니 많은 사람들이 각각 나름의 이유로 허탈함을 느끼며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찾기 어렵게 되니 당연히 인생의 의미도 찾게 어려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물리적인 재생산(출산을 통한 새로운 가정의 형성)과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재생산, 생애주기마다 다르게 체험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나 가치관을 형성하는 총체의 과정 - 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 마련인데, 조금이나마 생산성을 올려서 원가를 절감하고, 물건을 판매하고 경제를 순환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순한 논리에서 인간은 그 생산성 나아가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인간 소외의 역설에 '이제는 정말로 기본소득이 필요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잠시,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세금에 기생하는 사회를 좀먹는 무리와 그 좀먹는 무리를 포섭하여 더 크게 해 먹으려는 위정자들의 세금 생색 꼬락서니를 생각하니, 작금의 시국도 버티며 살기 어려웠는데, 앞으로의 미래는 더욱 막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 혼자만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자'는 다소 속물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돈, 그놈의 돈. 돈이 없으면 모든 게 Don't 이 된다. 돈은 가능성이다. 돈이 있다고 품위 있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품위 있게 살기 어렵다.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이다. 그의 다른 저서인 [행복의 정복]과 꼭 어울리는 말이다. 그놈의 말 많은 행복이라는 녀석을 정복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 때문에 싸움 나는 것도 당연한데, 대다수의 경우에는 돈의 '부족' 때문에 싸움이 난다. 돈이 무한정 있다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 없으면 (= 돈은 벌지만, 대출이자와 각종 공과금, 생활비, 오남용으로 얼룩진 각종 세금 등으로 잔고의 합이 0이 되는 현상)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무'의 상태가 된다. '無'를 생각하는 것과 '無'의 상태에 있는 것의 차이를 말해 무엇하랴.



조선시대 한량처럼 출근을 앞두고 공원 벤치에 앉아 세이렌을 담은 커피와 함께 글을 쓰고 있으니, 이것이 참말로 일상의 역설이고 인생의 모순 아닐까. 열심히 설문 조사하고 받은 기프티콘 속 세이렌은 웃고 있지만 무섭게 느껴진다. 사람들을 홀리겠다는 창업주 하워드 슐츠의 마인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배한 것 같아서 볼수록 꺼림칙하다. Holy s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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