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행복한 인간, 예능과 본능 사이
교환학생으로서의 일상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러한 이미지는 여행을 떠난 많은 교환학생들의 빈자리 가득한 교실과 만나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 예외의 방향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덴마크에 있는 첫 3달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인 남자를 보지 못했다. 처음엔 이런 환경이 정말 좋았다. 교환학생의 목적 중 하나가 영어 실력을 늘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감정을 계속 가슴에 안고 사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을 해소할만한 특별한 일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내겐 여행의 용이성 말고는 한국과 덴마크에서의 삶은 큰 차이가 없었다. 하나만 빼고. 한국에 있었다면 보지도 않았을 예능 영상들을 도대체 왜, 굳이 덴마크 방구석에서 보고 있을까라는 의문과 자기비판으로부터 이 글은 출발한다.
예능의 사전적 의미는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따위의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예능은 시대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때론 만들어냄으로써 우리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예능 트렌드의 변천사를 주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는 가치관은 다수의 경우, 사람들의 객관적 행복 기준이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무한도전과 1박2일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인기는 공개 코미디의 정적인 진부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청자들의 의지와 맞물린 결과다. 유머 코드의 종류와 상관없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장 원초적인 리얼리티 체력 예능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다음 물결은 오디션 프로그램. 한국 사람들이 노래를 좋아하고 경쟁에 익숙해 경연이 불러오는 묘한 긴장함을 내면화하는 민족이기에 인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이면에는 공정함을 원하는 일반 대중들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었다. 인생역전 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진 과도한 설정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꾸준히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는 그렇지 못한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꿈을 이루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후, 육아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줄기가 뻗어 나왔다. 많은 경우 연예인 자식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인기가 좌우되기도 하였지만, 이런 포맷이 갖는 함의는 묵직하다. 특히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함으로써, 당연히 육아도 남자의 영역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저출산과 결혼 기피현상, 파편화된 관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가족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혼족과 홈족. 혼자 집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2016년 통계청의 '한국인의 생활시간 변화상' 자료에 따르면 1999년 14시간 35분에서 2014년 14시간 59분으로 24분이 늘어났다. 처음엔 데이터를 보고 의아했다. 놀거리도 많고 할 일은 더욱 많아졌는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 수치에 가구 구성원의 비중이 4-3-2-1의 순서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아진 현실을 감안하면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궁금중의 일부는 요리와 관찰 프로그램의 인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혼밥이라는 용어가 상당히 일상화되었지만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주로 무엇을 먹겠는가? 편의점 도시락 아니면 라면 등의 간단한 음식들이다. 하지만. 매번 인스턴트 음식을 먹을 수 없기에 요리를 배울 필요성이 늘어났고, 셰프들의 권위 내려놓기 흐름과 만나 요리와 먹방 예능의 인기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혼족과 홈족들이 '혼자 사는 삶도 괜찮아'라고 얘기하거나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며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본인과 같이 혼자 지내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며, 영상 속 친구와 함께 더욱 시간을 보내고 있게 된 것이다.
다음은 트렌드는 힙합의 오버그라운드 현상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힙합을 단순히 멋있고 세보여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그곳에서 무기력함을 보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힘합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다수는 가진 게 없고 가질 능력도 없고, 이런 내 얘기를 할 시간과 공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약자의 말을 비트와 라임에 맞춰 내뱉는 것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힙합의 자기주도적 자유분방함은 현실에 무기력한 젊은이들의 욜로(YOLO) 욕구를 취항저격 했다.
마지막으로 썰전, 알쓸신잡, 어쩌다 어른 등 수많은 지식 예능의 인기에서 필자는 위기감을 봤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자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위기감과 절박감만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살던 대로 사는 관성은 강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지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적다. 왜냐하면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늘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늘어나는 수명만큼 지식도 늘어나야 된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수십 번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공부는 언제나 그렇듯 지루하고 재미없다. 이때, 지식 예능이 유머의 형태로 공부의 진입장벽을 낮추어, 지식 전달 자체보다 대중들이 지식을 소비하도록 만듦으로써 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구글 신사업 책임자 모가댓은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공학자로서 행복을 분석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보다 왜 행복하지 않은지, 왜 불행한지 명확히 정리하여, 행복은 불행의 요인을 제거해나갈 때 닿을 수 있다고 했다. 불행을 없애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와 같이 인간이 불행해지는 근원은 여러 가지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의 연산 관계를 방정식처럼 풀어내려는 작가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각자 저마다의 인생 좌표가 있다고 할 때, 본인의 좌표를 (?,?)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가로축과 세로축의 기준은 비교 대상마다 달라진다. 한 사람의 삶에서 원점(0,0)은 어디란 말인가. 이런 고민이 중요한 이유는 내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느낄 때, 몸과 마음이 행복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인간은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러한 심리 기제에서 예능은 일종의 중화제 또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다만, 이때 느끼는 감정은 행복보다는 재미에 가깝다. 이러한 재미는 일시적 효과가 강하기에 불행한 상태에서 디폴트 값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불행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자는 모가댓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불행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돈과 인간관계. 이런 얘기들이 많다.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집 사고 차 사도 그 행복 잠깐이다. 그래서 우린 돈과 소비에 대한 욕구를 절제할 필요가 있다" 류의 주장 말이다. 머리로는 동의할 수 있지만 가슴으론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못해봤기 때문이다. 돈이 많아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돈이라는 조언은 잔인하게 들린다. 돈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할까’ 고민할 때, 돈이 부족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같은 불행이라도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보다는 돈이 많은 채 불행한 게 낫다.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직장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이직했는데, 어딜 가나 비슷한 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창업을 한다든지, 1인 기업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쌓아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에 인간 관계 역시 불행의 근본 원인처럼 보인다.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낼 때까지 생각의 흐름을 쫓고 한 주제에 대해 뇌를 끝까지 몰아붙이고 싶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불행의 근원들을 어떻게 없애나갈 수 있을까? 필자의 대답은 예능을 매개변수로 활용하여 인간의 근본적 불행 요인이 동시에 행복의 원천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난 20년간의 신경과학 연구는 선호(liking)와 욕구(wanting)에서 받는 보상(positive reinforcement) 채널이 다름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욕구는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상황(a state of wanting without liking)을 중독이라고 한다면, 좋아하지만 욕구는 없는 상태(a state of liking without wanting)를 심미적 기쁨(asthetic pleasure)을 느끼는 상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동기부여의 관점에서 해석한 논문의 일부를 소개하겠다.
This means that a state of liking for a specific object or activity cannot be understood as a motivational state and that liking is not a prerequisite for generating motivation. From this perspective, liking refers to an emotional state whereas wanting has more to do with motivation and decision utility (Berridge and Aldridge, 2008).
정리하자면, 필자는 불행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능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우리에게 기쁨(pleasure)을 주는 선호(liking)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욕구(wanting)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TV 속에 편집된 사람들의 모습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예능은 또 다른 동기(Motivation)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불행의 시간을 겪을 수밖에 없다면, 그 불행의 정도를 약화시키기 위해 예능을 봄과 동시에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사는데 필요한 동기부여의 촉매제로써 예능을 활용하자는 것이 이번 주제의 결론이다.
덴마크 방구석에서 혼자 예능을 보고 있을 때면, 별의별 생각이 든다. '4학년이라서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데, 영어 실력 늘려야 하는데 한국 영상이나 보고 있고,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기도 한 상황을 굳이 쓰는 이유는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한국에 살며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한숨 쉴 수 있으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에 있다고 해서 언제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글로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행복하든 불행하든 글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록이자, 누군가에게 행복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사이트
1.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756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