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행복의 정의(definition)와 행복 데피니션
덴마크에 관광을 가거나, 연구나 조사를 위해 탐방하는 것과 거주하는 것은 다르다. 마감기한이 짧을수록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삶의 태도가 전자라면, 일상의 '루틴(Routine)'을 유지하는 생활이 후자라 할 수 있다. 밤이 길고, 비바람이 잦은 이곳 덴마크.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을 시키면 2만 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 동네에서, 헬스장을 가는 것만이 일상의 가성비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헬스 용어 중에 '데피니션' 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근육 선명도'쯤에 해당한다. 운동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근육의 크기를 키우는, 벌크업과 커진 근육이 선명해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근육 크기 증대와 근육 섬유질을 선명하게 컷팅(leaning out)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목적을 제대로 정의하고 그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다면, 행복에 닿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행복의 모양과 뜻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막연함에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께 몇 가지 행복 정의를 소개해본다.
Happiness (also being well and doing well) is the only thing that humans desire for its own sake, unlike riches, honor, health or friendship…(중략) Eudaimonia, the term we translate as "happiness", is for Aristotle an activity rather than an emotion or a state. Specifically, Aristotle argues that the good life is the life of excellent rational activity.
- Wikepedia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바탕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 활동을 훌륭히 수행하는 것을 행복으로 봤다. 이러한 행복 정의는 목적론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훌륭하고 좋은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과거의 지배 담론이기도 했다.
Experiential well-being, or "objective happiness", is happiness measured in the moment via questions such as "How good or bad is your experience now?" In contrast, evaluative well-being asks questions such as "How good was your vacation?" and measures one's subjective thoughts and feelings about happiness in the past. Happiness is not solely derived from external, momentary pleasures. Indeed, despite the popular conception that happiness is fleeting, studies suggest that happiness is actually rather stable over time.
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은 기쁜 감정 상태의 집합으로 넓게 정의할 수 있다. 좁게는 행복을 '경험'과 (평가된) '기억'으로 나눈다. 또한 심리학 관점에서 행복이란, 행복의 휘발성(fleeting)을 인정하면서도 내면에서 비롯된 행복의 안정성을 개념을 내포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행복 정의엔 함정이 있다. 좋고(Good), 나쁜(Bad) 상태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행복을 정의해봤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긴다. ‘행복을 정의하면 뭐가 달라지는 것일까?’ 개인의 입장에서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을 제약하는 환경은 단순히 행복을 정의한다고 해서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는 1인칭 단수가 ‘우리’라는 1인칭 복수가 될 때는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각자의 행복 정의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면,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 출국 전, 소중한 사람들에게 각자의 행복 정의를 물은 적이 있었다. “행복을 한 문장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행복한 상태를 묘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중 한 친구는 자신의 행복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름에 에어컨 바람 쐬며, 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 이렇게 말했다. 조금은 한심하게 들리는가? 하지만, 이 친구가 로스쿨에 합격한 후 필자에게 처음 내뱉었던 단어를 알았다면, 다르게 느끼시라 생각한다.
그 단어의 초성은'ㅎㅂ'이었다. 로스쿨에 합격한 친구와 소주잔을 부딪치며 들었던 단어는 '행복'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하루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공부하는데 쏟지만, "공부해라"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친구를 ‘해방’이라는 단어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행복한 상태'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목적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다. 행복은 상대방의 가치관을 이해할 계기를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혐오의 언어가 만연하는 요즘 시대에, 쉽게 대립이 발생하는 가치를 논하는 것은 갈등만 키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 정의와 대화는 서로가 함께 행복하기 위한 ‘과정’ 그 자체로서 가치가 크다.
맛있는 대화는 덴마크에서도 계속 됐다. 대화의 시작은 “How are you?” 와 “What did you do today?” 같은 의례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주방에서 덴마크 친구인 크리스토퍼를 만났다. 내가 헬스장을 등록했다고 하니, 그는 “저번에 농구 커뮤니티 가입한다고 했으면서 왜 헬스장에 다니는 거야?”라고 물어봤다. 춥고, 지루하게 긴 겨울을 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친구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헬스장은 사회적이지 않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농구 커뮤니티에 왜 가입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농구나 다른 단체 구기종목이 사람들과의 교감도 많은데, 헬스는 남들과의 교감보다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나는 대충 대화를 마무리 하고, 마저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나는 덴마크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봤다. 다양한 세상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며 입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러지 못했다. 타지 생활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제약과 변수들이 있었지만 스스로의 행복에 관한 정의를 제대로 내지 않은 사람에겐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이번 글은 여러 행복 정의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를 활용해 행복의 대화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이러한 얘기는 누구나 한다. 그래서 한 발짝 더 나가고 싶었다. 최근 행복 담론은 긍정심리학과 진화론에 기초해 개인의 삶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 특히, 한국의 행복지수가 GDP 대비 낮은 이유를 '타인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분석하는 글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허나, 필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껏 타인을 제대로 신경 쓴 적이 없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또는 자신을 국가에 투영해 행복을 추구했을 뿐이다. 타인의 인정과 무시에 일희일비 한다면, 본인만의 행복 데피니션으로 코어 근육을 키울 필요가 있다. 서두에서 근육 선명도를 얘기했다. 각자 행복의 정의를 수립한 후, 소중한 사람과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면서,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행복의 선명도를 키워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