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행복의 강연과 행복의 가면, 그 한 끗 차이
지식 예능의 인기가 꾸준하다. 예능의 기본 목적이 바쁜 현대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함이라고 할 때, 지식 예능의 확산은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예능 프로그램을 현재의 결핍을 채워주는 도구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지식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제 진부함을 넘어 마치 한국인의 강박관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본인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강연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TED도 보고, 행복 연구를 하고, 글까지 쓰고 있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었었는데, 왜 우리는 나이 불문하고 죽을 때까지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좋은 생각은 널리 알려질 가치가 있다는 TED의 슬로건에서 본인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단군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가 끊임없이 배우려는 이유는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 대학 신입생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매주 한 편씩의 TED 강연을 봤다.
대학을 지식의 상아탑이라고 정제되지 않은 비논리적이고, 선동적 구호가 넘치는 캠퍼스와, 낡은 지식에 정년 보장의 권위를 불어넣어 마치 새로운 것인 양 가르치는 강의실은 내겐 죽은 대학이었다. TED는 달랐다. 살아있는 지식, 타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무료로 들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유료로 TED를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오르후스는 2016년부터 TEDxAarhus를 개최하고 있었고, 나는 10만 원 상당의 티켓을 구매했다. 필자에겐 10만 원이 나름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결제 버튼을 누르는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렌 버핏의 명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Price is what you pay, Value is what you get."
이번 TedxAarhus의 주제는 [Into the wild]로, 강연은 총 3개의 Session을 각각 <Embrace the wild>, <Adapt to the wild>, <Overcoming the wild>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위 행사는 티볼리 놀이공원에서 개최되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TED 타투를 받을 수 있었다. 신기했던 사실은 세션마다, 기존의 TED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음악 공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녁에는 와인과 함께 재즈 공연을 보면서 타파스(TAPAS)를 먹고, 세션에 참가했던 청중과 그리고 연사들과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 가지 놀랐던 점은, 저녁 만찬 자리에 청중과 연사 구역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이 줄을 서서 음식을 놓거나, 자리가 없으면 공원 벤치에 앉아서 강연 내용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했다. 타인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모습에 나는 행복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상 깊었던 강연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강연은 Stephen Willacy의 <What is a good city for everyone> 이 강연자는 앞선 글에서 소개했던 시청 건물을 짓는데 참여한 또 다른 건축이기도 하다. 강연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 도시를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였다. 특히 그는 벤치의 개방성에 주목하며, 간단한 메시지와 디자인으로 모두에게 좋은 도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강연은 아마 한국이었다면 강연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Miranda Kane의 <Fighting stigma with storytelling: Lessons from a former sex-worker>. 그녀는 원래 매춘부였다가 현재는 영국에서 스탠드 코미디언으로 활동 중이다.
강연 내용을 차치하고, 자신의 과거와 직업에 당당한 태도를 가진 연사의 모습이 정말 멋졌다. 흔히 가질 수 있는 편견들로 어떤 이는 동정심을 어떤 이는 주제넘은 참견을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직업의 관점에서 오히려 유머 있게 돈 받고, 성관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걸 해결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에게 와서 물어보아라. 직접 인터뷰를 요청하라. 자기들끼리 왈가왈부하지 말고." 당당함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을 따를 때, 자신의 언행에 당당해질 수 있다. 식사 후,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개인적인 얘기를 더욱 들을 수 있었다. “유머와 풍자로 매춘부의 처지와 인식을 개선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하다.”
세 번째 강연은 Mezhdeh Ghaemiyani의 <A refugee's journey to safety>. 제목에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듯 '난민' 이야기였다. 먼저, 필자는 한국의 난민 수용을 조건부 반대한다. 일부 사람들이 '인권'을 거론하며 '당위'만을 강조한 난민 수용을 주장한다. 그러나, 논리와 설득 없이 당위에만 호소하는 사람들이 유럽의 극우정당 인기 현상 설명할 수 없다.
덴마크도 예외는 아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반(反)이민주의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국가다. 북유럽이 행복한 이유가, 상대적으로 이민자 유입이 적기 때문이라는 연구와 여론이 존재한다. 이렇듯, 민주주의, 자유, 평등을 강조하는 국가들조차 난민 이슈와 관련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녀의 난민 생활 경험이 연민을 불러일으켰지만 공감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감정 회로가 변했다.
앞서도 말했듯, 이유와 논리 없이 강요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필자에게, 친절을 선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게 난민이란 기존에 잘 살고 있는 시민들의 세금 도둑이자, 혼란의 씨앗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국민이 난민 수용을 반대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태도가 옳고 그르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그럴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미 유입된 난민들은 어찌할 것인가? 여기서 핵심은 유입 ‘될’과 유입 ‘된’이라는 시점 차이다. 자의든 타의든, 결국 한 국가의 배려로 이미 편입이 된 사람들에게 기왕이면 친절을 베푸는 게 낫지 않겠냐는 그녀의 실제 경험담은 잔잔한 울림을 줬다.
덴마크 70대 백인 노인이 베푼 친절과 배려 덕분에, 그녀는 전쟁 통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과거의 자신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난민들을 돕고자 현재는 심리학자가 됐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친절이고, 친절의 선순환으로 테러의 위협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은 내게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 비록 내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포용력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도대체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우려고 할까? 명확한 대답을 위해 한 가지 전제하자면, 배우려는 사람만 끊임없이 배우려고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관성에 따라 살던 대로 산다.
대표적인 단어가 신념 기억이다. 장석주 시인이 언급한 신념 기억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신념화 된다는 현상을 말한다.
반대 개념이 학습 기억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직간접 경험의 확장으로 정의하고 싶다. 자신이 기존에 믿고 있던 사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다른 것을 배웠을 때 더욱 발전한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은 그 느낌을 잊기 힘들다. 느낌은 곧 깨달음이 되고, 삶의 일부가 되어 개인의 새로운 행복을 빚어낸다. 학습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것만 고수하는 사람들은 딱 그 범위만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상유지는 일종의 행복 가면인 것이다.
지식 예능의 홍수시대에 새로운 행복 가면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방송을 보고 난 후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그것이다. 누군가의 지식을 단순히 보고 듣는 것만으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강연은 내 삶에서 해석되고 재창조될 수 있을 때, 유의미하다. 리뷰를 남기든 누군가와 대화를 하든 타인과 배움을 공유해보자. 좋은 생각은 널리 알릴 가치가 있다. Ideas worth sp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