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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Feb 12. 2024

죽음이 비즈니스가 될 때

​장례식장에서는 다망하여 말을 잃을 때가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숫자를 생각하는 것.

돈 때문에 죽은 사람 위에 돈을 태운다는 것.

한 줌의 재가 되는 과정까지의 정렬된 규칙과 통일성 - 수골함을 갖고 주차장에 당도. 울다 가도 노잣돈에 수고비에, 위로비에, 동창회비에,,, 죽음 앞에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이승같은 현실.


죽음은 살아남은 자에게 어떤 힘을 불어넣는가.

공허한 말은 재가 되어 떠나버린 망자의 흔적처럼 희미하게 사라진다.


태어날 때도 울고, 죽어서도 울고, 울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인생이리라. 울지 못하는 자,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

아, 울고 싶다.


모든 삶과 죽음이 어찌 사사로이 설명되고, 설명할 수 있으리오.

죽을 때까지도 산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일,,,겪지도 보도 싶지 않지만 그것 또한 인생이리라.


스스로의 삶을 결정한 사람에게 어떠한 위로가 필요하리오.

최후의 순간 만큼은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니, 남아 있는 자들은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그리워 하거나 희망하지 않고, 지금을 살면 된다.


슬퍼하거나, 술을 퍼 먹거나, 슬리퍼를 신고 장례식장을 오거나

살아남은 인간들은 각자의 모양대로 살면 된다.


하지만 가장 용납하고 싶지 않은 건, 죽음 자체를 돈으로 치환하여 셈을 따지는 일.

돈 때문에 죽은 자를 죽음의 장소로 보내는 그 순간에도 돈 때문에 산 사람이 울어야 하는 일.

산 사람이 돈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죽음이 죽고 싶은 마음을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는 용납하고 싶지 않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허망하다.



장례식장에서는 다망하여 말을 잃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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