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을 현실이라고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건 현실이 된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누군가 현실적이라고 얘기할 때마다 자연스레 갖는 반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게 현실이라며 스스로 타협하는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고 집단이 믿는 그 현실과 그 자체로 현실이 되는 자기실현적 착각이야 말로 우리 인류 역사가 아닐까 싶다. 마침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여론 조사가 권력이고 곧 정의가 되는 시대에서 시의 적절한 재밌는 문장을 발견.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를 보면, 여론조사를 자주 접하는 사람일수록 지지 후보나 정당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이길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해서 그쪽에 붙으려 하는 성향이 크기 때문이다
양당제/다당제의 우열을 논할 것은 아니지만, 동서가 빨강과 파랑으로 갈린 모습이 흡사 태극기의 국가답다. 무엇이 맞다고 느끼고 옳다고 판단하며 자신의 가치와 이상 추구를 타인에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자신감과 때론 오만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의 정체성은 나라는 존재의 고유 의식과 더불어 귀속집단의 감각과 결합되어 형성된다고 한다. 이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밖으로 꺼내어 놓는 이유는 필시 공기처럼 스며든 소속감이라는 의식이 배타성을 만들고 허례허식을 만들고, 주변의 사례를 일반화하여 그 너머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이 장벽이 나쁜 것인가? 부자는 부자들의 울타리 안에서, 가난한 자는 가난의 안에서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은 중산층 아니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소속으로 사는 것 모두 시비의 영역이 아닐 텐데 왜 집단 착각은 생존의 문제까지 직결될 수 있는 것일까?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집단 착각은 우리 사회가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는 깊고도 불안한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이 사회가 이 집단이 그리고 내 삶이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닌, 고립이 아닌 자립을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 스스로 인생을 일으키는 법. 흔들리지 않는 법. 그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틀렸다고 말할지라도 인생에서 한 번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정답에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여 앞으로 나아갈 때를 결정하는 법. -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의미 있고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상관없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집단 착각은 우리 사회가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는 깊고도 불안한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다른 이들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 기준으로 삼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순응을 기본 태도로 장착하면서, 우리는 개인에서 집단의 구성원으로 변모한다.
진짜 전문가를 파악하는 데 매우 서툴 뿐 아니라, 누군가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굴복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진실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눈앞에 닥쳐온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말 그대로 무슨 일이건 해버린다.
자기 인식이랑 우리가 지닌 고유한 특성과 함께 우리가 속한 귀속집단에의 감각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친절한 말을 들으면 친절한 말을 돌려주는 것이 사회적 상식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되며, 그런 거짓말이 드러나지는 않을지 걱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내 생각이 집단의 의견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뭔가 실수를 했을 때와 동일한 반응을 하게 된다.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를 보면, 여론조사를 자주 접하는 사람일수록 지지 후보나 정당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이길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해서 그쪽에 붙으려 하는 성향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에 더 쉽게 설득되지, 누군가 고함을 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인터넷 트롤은 사용자들의 적이 아니라 친구 행세를 하고 있었다.
작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부조화한 행동을 할 때, 그러면서 '이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나름대로 선의의 거짓말로 둘러댈 때, 우리는 그 나쁜 행동의 이면에 있는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기만(deceiving)은 진실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남들을 속일 수 있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할 때 우리의 두뇌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고 달려 나간다.
얼마든지 자신을 속이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의 내적 평가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보다 진실할 때 기분 좋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이제 우리는 진실성 (sincerity) 대신 도덕적인 느낌이 덜한 '진정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짓과 반대되는 의미로 진짜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authenticity, 진정성은 좋은 말처럼 들린다.
더 나은 체제가 더 나은 삶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반대가 옳다. 더 나은 체재를 개발하는 방법은 오직 더 나은 삶을 창출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