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이 곧 죽음이 되고 죽음으로써 평생을 살아가는 모순과 역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행복과 우울증은 공존할 수 있을까? 의문은 이내 의무로 바뀌었다. 행복과 우울증은 공존해야 한다. 다만, 검은색과 흰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듯 우울증의 전염성이 너무나 강해, 이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행복해지는 몇 가지 방법'류의 책에 거부감이 강할 것이다. 본인도 그렇다. 별 대단치도 않은 방법들을 나열하면서, 마치 글쓴이는 인생을 해탈한 듯 얘기하는 태도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가 실제로 그랬는지, 독자인 내 시선이 삐딱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감사하기' 등의 당연해 보이는 말들을 당연하듯이 내뱉는 무책임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몰라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지만, 마주한 우울한 현실에, 살아온 관성에 치이다 보면 어느덧 감정은 가슴이 아니라 세상을 따르게 되어, 읽고 듣고 알게 되어도 실천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파편화되고 있다. SNS가 우리를 연결하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그 연결은 나와 너의 만남인 우리가 아니라 나와 또 다른 내가 있는 무리만 늘렸다. 빈곤이 빈곤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공허함만 커지는 역설의 과잉 상태에서 혼란을 느낀다. 이때, 빈곤과 과잉 사이의 빈틈을 우울증이 헤집고 들어온다. 우울증은 결핍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자아의 과잉이다.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밖에 없게 된다. 그 사람은 인생의 시점이 어딘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1인칭 주인공인지 관찰자인지 헷갈려 하다가 가장 쉬운 선택에 이끌려 버린다. 그들은 잠시나마, 어쩌면 영원히, 전지적 작가가 되어 자살을 통해 삶이라는 소설에 결론을 내버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라고 물어보면 보통 여행의 모습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을 여행처럼 살려고 노력하지만, 노력이 일상이 될 뿐 일상이 여행이 되지는 않는다. 일상이 어떻게 여행이 될 수 있느냔 말이다. 돈이 없어서 또는 시간이 없어서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우리는 일상에서 여행의 꿈을 꾸지만 꿈을 실현하며 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의 행복을 정복해야 한다.
정복이란무엇인가? 버트런드러셀의저서인 [행복의정복]의영문제목은 [The conquest of happiness]다. 필자에게정복이란 'Con(with)+Quest(ask)'이다. 즉, 함께행복에대해질문을던지고탐구하는행위가바로행복의정복인것이다. 그러므로행복정복의여정은질문에서부터시작될수밖에없다.
첫 번째 질문은 ‘일상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무엇인가'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단조롭다. 단조로움은 다시 말하면, 우리 삶에는 일정한 루틴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상의 행복은 행복 루틴에 좌우된다. 이런 맥락에서 행복은 습관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 '행복 루틴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 것일까?'
행복루틴은행복채널의다양화와밀접한관련이있다. 러셀은이렇게말했다. "관심분야가많을수록행복해질기회는그만큼많아지고, 불행의여신의손에휘둘릴기회는그만큼줄어든다." 그렇기때문에우리가첫번째로해야할일은내가무엇에관심이있는지를적어보는것이다. 생각하는것을넘어서적어야한다. 그게구체적인계획의시작이다. 막연하다고느껴진다면, 학교에서배웠던과목들을떠올려보자.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체육, 미술등. 예를들면, 국어에는독서, 영어에는미드보기, 사회는정치평론, 음악은콘서트관람, 체육에는운동, 미술 - 미술관방문처럼무엇을중점적으로할지정한다. 이후계획을세분화한다. 계획은계획으로그쳐서는안되기때문이다. 계획은반드시액션플랜이어야한다.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씻기다. 이유는 단순하다. 머리를 감으면 잠이 깨는 것과 같은 원리다. 씻기 전에는 학교 또는 회사 가기 싫다고 생각하다가도,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화장품을 얼굴에 바를 때면 '그래도 공부해야지, 돈 벌어야지, 오늘도 힘내자!'하며 스스로 생각의 전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샤워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 시간만큼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에 물을 묻힐 때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본인을 사이버 공간에 전시하지 않고, 거울에 비친 민낯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게 행복 시작의 출발점이다.
"당신이 먹은 음식으로 뭘 만드는지 말해 봐요.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리다." 라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말했다. 잠시 생각해보자. 오늘 하루 먹은 음식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만약 1,2단계까지 잘 수행했는데도 내 인생에서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항상 새해를 앞두고 하는 의식이 있었다.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노트에 적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 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고 나아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성장하는 삶. 이때 성장 앞에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 변증법적 성장을 하는 사람. 변증법의 핵심 원리는 정반합(正反合)에 있다. 우리의 성장, 인생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합(合)
생산은 합을 늘리는 데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말이다. 이 질문 역시 자신의 흥미에 우선 근거해야 한다. 필자는 어렸을 때 운동부 생활을 많이 해서 기초 독서량이 부족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세계관이 넓어지며 인생의 다양한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쁨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블로그를 만들고, 독서 리뷰를 남기기 시작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은 필자는 정치평론 대회에 글을 내기도 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지만 학원에 쓰는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혼자 공부하며 터득한 방법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본인이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의미는 규정하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적어도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들의 합이 곧 인생이 의미로 쌓이게 된다. 영어 단어에서 다의어가 중요하듯, 인생의 의미를 다양화할 수 있을 때 인생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헌데, 이런 사람들도 밖으로 나올 때가 있다.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할 때다. '기분 좋아지는 법,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법, 행복해지는 법' 등을 검색하며 그들은 때때로 포털 사이트나 커뮤니티에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고민과 증상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여기까지는 좋다. 아니, 사실은 좋지 않은 측면이 크다.
한국에서 우울증을 악화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커뮤니티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건전한 커뮤니티의 붕괴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얘기하기 전에 주로 무엇을 할까? 아마도 자신과 관련된 기사를 먼저 찾아보고 사람들의 생각을 댓글로 확인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포털사이트에 만연한 비이성적인 댓글들은 기본적으로 특정 커뮤니티에서 생산된 선동과 혐오의 언어들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누구나 이용하는 공간에 극단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시킨다. 마치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위험한 사실은 극단과 혐오의 언어가 우울증 환자의 내재된 부정성과 만났을 때, 그들의 생각은 정처를 잃은 채 불행의 길로 좌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커뮤니티를 복원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이번 글이 여러분에게 울림을 주었다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공유함으로써 공감으로 따뜻한 커뮤니티를 조금씩 지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일상이 행복한 인생은 음악과 같다. 여러 마디를 이어 붙여 하나의 멜로디를 만든다고 할 때, 평생 같은 화음으로만 연주하면 인생이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우울증을 인생의 템포를 조절하는 안단테(Andante)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행복을 연주해보자. "천천히 걷는 빠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