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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독서]니코스 카잔차키스/이윤기 - 그리스인 조르바

FROM ZORBAS THE GREEK TO THE GEEK

by AND ONE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다 간
두 거인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21세기를 맞은 나에게 여전히 현실이다.
내 연하의 친구들에게도
그러리라고 확신한다.
- 역자 이윤기-

올 한 해 40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일일이 세지는 않아서 숫자는 틀릴 수 있지만 중요치 않습니다. 도끼와 같은 책은 언제나 극소수이며 읽었던 책을 다시 봤을 때 새롭게 보일 때는 1권의 채을 읽었으나 100권의 책을 읽은 것처럼 기쁨은 배가 됩니다.


24년 하반기부터 필자는 자기 습관을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책은 읽지만 그 내용이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고치고 싶었고, 어느 곳에서 본 문장에 영향을 받아 어떤 책이든 일주일 이내로 완독 한다는 습관을 새로이 수립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올해로 4번째 읽었습니다. 과거엔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행위를 '완독'이라고 부르고 원하는 내용만 읽는 것을 발췌독으로 구분했었습니다만, 이제는 '완독'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솟아오르고, 밑줄이 없었던 문장이 제게 말을 걸고 이미 그어져 있던 문장은 제게 고함치는 상황을 겪게 되면, 과연 '완(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 가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한 가지 습관을 추가했습니다. 책을 다 읽는 것도 중요한데, 작가 (원작자와 번역가 모두)와 관련된 인터뷰를 최대한 모두 읽는 것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연보를 정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는 조르바(zorbas)를 실제로 만난 후 24년이 지나서야 그에 대해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곳곳에 붓다와 실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니체의 흔적이 보이고, 터키의 지배하에 있던 크레타 섬 출신으로서의 자부심과 반항심 등이 이해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올해 새로운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입체적으로 읽지 못하였겠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부디 하나의 책을 종횡무진하여 가로와 세로축이 십자가가 되어 입체적 읽기의 즐거움이 있으시길!


이 책을 덮은 후 번역가이자 소설가였던 이윤기의 삶에 관심이 생겨 그가 했던 10년 치 인터뷰를 PDF로 인쇄하여 하나씩 정독을 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였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개역판, 2000)를 덮으며 다른 번역서도 읽고 싶을 만큼 책과 작가에 대한 애정이 그의 문장에서, 노년의 성숙한 진심을, 실제 두 번의 크레타 섬 방문 이야기에서 좋은 번역을 위한 의무감과 거룩함을 느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번 읽으며 자유를 갈망하고 두 번 읽으며 죽음을 고민하고 세 번 읽으며 삶이 보이고 네 번 읽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24년의 마지막을 향해 내려오는 밤하늘 아래에서 마치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올 때, 아래의 문장들과 함께 오독오독 밤을 씹어 드시기를.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보고 있는 동안 바다, 대기 그리고 내 여행계획으로 짜인, 보이지 않는 그물이 내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고독이야 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니까.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래" 나는 긴 문장으로 나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시 대답했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를 수 있었을까.

그의 표정이 내 내부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던 셈이다.

내게 그것(미완성 원고)을 파괴할 용기는 더 이상 없었다. 정신적인 낙태는 시기를 놓친 것이다.

문고판 단테를 손에 들고 나는 자유를 즐겼다. 아침 일찍 고르는 단테의 시행이 하루 종일 그 운율을 나누어 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파도는 부드럽게 만으로 밀려가고 있었지만 해변을 그리는 포말의 선은 부수지 않았다.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 근성이 아닐까? (중략)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내 언제면 혼자, 친구도 없이, 기쁨과 슬픔도 없이, 오직 만사가 꿈이라는 신성한 확신 하나에만 의지한 채 고독에 들 수 있을까?

바다가 펼쳐지는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달려온 듯한 파도가 크레타 섬의 해안을 물어뜯고 있었다.

내 육신은 기운이 넘쳐 내 말을 순종했다. 마음은 파도를 응시하다 한줄기 파도가 되어 순순히 바다의 율동으로 잦아들었다.

이윽고 내 가슴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희미하긴 했지만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내 내부에서 일어났다. 나는 누가 나를 부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무서운 예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내가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에게 호소하고는 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조르바는 저항도, 질문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기적 같은 순간이 오면 인생의 모든 것은 아침처럼 산뜻해 보이는 법. 대지는 부드럽고 구름은 바람에 그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어 갔다.

요모조모 따져 봐도 나는 아무래도 행복을 헐값으로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하느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니까.

별이 빛났고 바다는 한숨을 쉬며 조개를 핥았고 반딧불은 아랫배에다 에로틱한 꼬마 등불을 켜고 있었다. 밤의 머리카락은 이슬로 축축했다.

돌연한 영감의 돌풍은 한갓 꿈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언어에 감금되고 언어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음습한 땅속의 두더지처럼, 구형의 머릿속에 갇힌 채 두뇌는 쉬고 있었다.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나 역시 내 갱도를 파들어 갔다. 쓰면 쓸수록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내 감정은, 안도, 긍지, 혐오감으로 착잡했다. 그러나 나는 원고를 끝내면 묶고 봉해 버리면 해방된다는 생각에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마시면서 큼직한 토끼 두 마리처럼 오독오독 밤을 씹어 먹었다. 바다가 포효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여자가 영원한 사업이란 이야기는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나는 일어서서 거지처럼 손을 내밀고 빗방울을 받았다. 별안간 울고 싶었다. 내 것이 아닌, 보다 깊고 막연한 슬픔이 축축한 대지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시각에 그 비가 내부의 슬픔을 일깨운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으로 즐거운 일인가

나는 철필을 쥐고 종이 위에 엎드려 빗줄기로 짜인 그물을 찢고 다시 숨을 쉴 수 있도록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선택을 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낮 동안은 나도 강건했다. 내 마음은 경계 상태를 유지하여 여자의 환상을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는 물가를 걸으며 파도를 희롱했다. 파도가 나를 적시러 몰려올 때마다 나는 달아났다. 행복에 겨운 나머지 나는 중얼거렸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중략)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되기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에 설명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

하느님, 회사의 이익, 그리고 과부가 조르바의 머릿속에서는 아무 모순도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달은 얼마 있지 않아 질 것 같았다. 둥근 달은 창백한 초록 빛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요가 바다 위로 펼쳐져 있었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예술은 우리의 오장육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살인적인 힘을 충돌질한다. 필사적으로 살인과 파괴와 증오와 타락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술은 달콤한 노래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다.

나는 내 운명을 데려왔네. 운명이 나를 데려온 것은 아니네.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만 행동하네. 나는 내 운명을 이곳에 데려와 노예처럼 일해 왔고 지금도 노예처럼 일하고 있네.

나는 내 행복을 내 키에 어떻게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네. 나는 나대로 내버려 두게. 그렇다면 나는 위대한 사람일 것일세. 나는 내 행복에 맞추어 키를 늘일 것이네.

많은 사람들은 아무 짓 않고 애국자 노릇을 합디다.

당신 속에도 악마 한 마리가 있지만 아직 이름은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사색, 내 약점, 내 헛소리를 (이 세 가지가 어디가 다릅니까? 글쎄요, 모르겠어요) 실컷 비웃어도 좋아요. 웃는다고 생각하니 우습군요. 그러니 세상에 웃음이 흔하지요. 사람에겐 바보 같은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바보 같은 놈은, 내 생각에는 바보 같은 구석이 없는 놈일 것입니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요?

두세 덩어리의 봄 구름이 아직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봄의 불안에 사로잡힌 채 지내야 했다. 나른한 기분, 가슴속의 정서적인 긴장, 내 몸 구석구석의 근질근질한 가려움, 크지만 단순한 행복(혹은 추억의)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서너 시간 걷는 피로가 봄이 불러일으킨 내 불안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정오 가까이 되었을까. 햇빛이 쏟아져 빛으로 바위를 씻어 내고 있었다.

바다는 배를 잡고 웃고 있었으며 하늘은 푸른 빛을 띠고 쇠붙이처럼 반짝거렸다.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조여 왔다.

동행이 있어서 둘이서 웃고 떠들다 보면 파도와 새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새와 파도가 말을 걸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정복하면서 나는 흡사 위험에서 벗어나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꽃병 같은 거예요. 아주 조심해서 만지지 않으면 깨져요.

명상도 일종의 광산이 아닌가. 그럼 나도 파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신의 거대한 갱도 속으로 들어갔다.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내 말 잘 들어요.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우리는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는 답니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조르바의 무릎은 천 번하고도 한 번 더 난파했던 그 가엾은 여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한치의 땅이었다.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조르바는 계속 지껄였다) 상상력 속에도 함정이 있어서 그는 이따금 거기로 빠지기도 했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이 옳고 그름을 얘기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나는 조용히 규칙 바르게 호흡하는 바다의 숨소리를 들었다.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햇빛을 받으며 음식을 먹었다. 시원한 녹색 바닷물 위에 뜬 것 같은 육체적 행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마음이 육체의 환희를 독점하여 그 나름의 형상을 찍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원고는 완성되어 있었다. 최후의 붓다는 꽃피는 나무 밑에 누워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다섯 가지 요소 (흙, 물, 불, 고기, 정신)에게 해제를 명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죽음은 삶처럼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나만의 조르바를 쓰면서 유폐되고 싶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필요치 않는 곳으로)

그날 내가 내린 구역질 나는 결론은, 일어난 사건은,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잠이 나를 이겼다.

내 마음은 다시 온갖 세상사를 만나고 있었다. 추억과 슬픔이 돌아왔다.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남자들 앞에서 운다면 말이죠. 남자들끼리는 통하는 기분이 있지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여자 앞에서는 남자는 늘 자기 용맹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 남자가 여자 앞에서 울음을 터뜨려 버리면, 이 가엾은 것들은 어쩝니까? 끝나는 거지요.

밤이 내리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아름다우리만치 조용했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그게 뭐 좋다고 읽고 있소?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인간의 죽음)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응시하지만 무섭지는 않아요.

밤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이 캄캄해졌다.

조르바, 사람이란 누구나 배 속에 악마 몇 마리쯤은 갖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요. 중요한 건, 이 악마들이 하는 짓은 달라도 목적이나 같으면 되는 것이지요.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나는 해변을 따라 잰걸음으로 걸으며 내 적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호령했다. "내 영혼에는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나는 피로로 슬픔을 재우려고 있는 힘을 다해 산길을 달려 내려왔다.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우리가 계집들처럼 그렇게 서로 위해야 할 만큼 약골이오? 물론 아니지. 그럼 영원히지...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 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해하고 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행복할 텐데.

세계는 술 취한 사람들처럼 휘청거리고 비틀거렸다. 땅이 갈라지면서 우정이나 애정은 그 속으로 처박혔다.

시간은 흘러가면서 달콤한 추억의 독물로 오염되어 갔다.

그림자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만 은밀하게 대화했다. 덕분에 나는 죽음과도 화해할 수 있었다.

조르바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 번역가 이윤기의 문장 <20세기의 오디세우스>, <개역판에 부치는 말>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드높이고, 그 드높이는 과정에서 조우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문학적 표정을 부여하려는, 참으로 초인적인 작업을 시도한 거인이 있다.

구체적인 체험으로서의 여행이 추상적인 꿈을 심화시키고 그 꿈이 여행의 무대를 확장시키듯이, 그의 삶이라는 것도 육체와 영혼의 상호 작용을 통한 심화와 확장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카잔차키스) 그리스라는 이름의 노파 얼굴에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소녀의 생기와 젊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이 끝날 즈음, 내 눈은 그리스로 가득 찼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이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인식, 그리스의 업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를 이끌어 성인의 세계로 안내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고행을 통하여 혼자 천국에 드는 것이 마침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메토이소노>.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다 간 두 거인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21세기를 맞은 나에게 여전히 현실이다. 내 연하의 친구들에게도 그러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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