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현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창열 도록을 사게 된 이유에 관하여
여름에 봤던 김창열 작가의 작품을 전시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시 찾았다. 물방울 하나에 깃든 수많은 상흔과 상념과 상징과 상상들. 그게 왜 그리도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쓰다만 글이 수북. 이어 붙이려니 변비가 글에도 옮을 것 같아 인내. 일단은 하이볼의 취기에 올라탈 심산. 김훈의 말처럼 위스키의 취기가 논리적이고 명석하다면 하이볼의 취기는 이상적이면서 어리석다. 그 달콤함과 청량한 탄산의 톡 쏘는 맛은 행복했던 (또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유년 시절을 회상. 수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탄산처럼. 그러다 기포가 가라앉을 때, 이윽고 침울. 하이볼, 이상적으로는 적당히 먹기 좋은 술이나 결코 적당히 끝날 수 없기에 술을 부르는 스노우볼.
스노우볼. 이제는 낭만의 시대에서 무기력과 절망의 시대로 접어드니 눈을 동동 굴려 만들었던 스노우맨 - 보다는 나랏빚이 스노우볼처럼 급속도로 늘어났다는 헤드라인 기사가 먼저 연상되는 나이. 그럼에도 12월이 되면 꼭 지키고 싶은 나만의 의식. 연말에는 반드시 예술을 마주하는 일.
결국 4만 원짜리 도록을 산 이유
지금 이 순간의 기억과 감정, 감각이
말짱 도루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생애 처음 누군가의 '도록'을 구매. 책을 구매하는 것과 다르게 도록을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 동시에 그 현장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이를테면, 그의 물방울 작품 하나를 몰입해서 볼라치면, "이쁘게 찍어"라는 코러스와 함께 카메라 셔터를 쳐대니 이윽고 나는 예술가의 광기에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광인'이 되어감을 발견.
결국 4만 원짜리 도록을 산 이유, 지금 이 순간의 기억과 감정, 감각이 말짱 도루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모든 것이 변할지라도 그때의 전시를 간직하겠다는 의지. 인스타 아카이브가 아니라 서재 한 구석을 기꺼이 차지해도 된다는 물리적 허영. (왜 내 집도 아닌 전셋집에서 이런 사치를 부리고 싶은 지 참 아이러니)
2차원의 공간에서 작품들은 공감각 대신 오직 시각에 의존한 해석의 대상이 되나, 사실 정반대. 시각의 집중이 오히려 사각에 존재했던 다른 감각을 불러온다. 도록을 펼치는 순간 그곳이 갤러리. 들러리가 없는 갤러리, 그것이 예술 프렌들리.
결국, 연말이란 그런 것.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을 의례적으로 하는 시기. 나이 먹을수록 매번 똑같이 할 수는 없으니 조금씩 세련됨을 가미할 필요를 느끼는 압박의 순간을, 축제의 시간으로 전환하는 기간.
따라서, 12월에 도록을 산다는 건 온전히 예술을 감상하겠다는 일종의 선언. "언제 다시 꺼내보기나 할까?"라는 질문은 중요치 않다. 누군가 죽도록 본인의 인생을 헌신한 위대한 기록을 평생에 걸쳐 보는데 필요한 돈이 4만 원이라면, 나는 4번의 점심 아니, 한 번의 술 약속을 줄이는 걸 택하리. 그게 나와 여러분, 우리들의 연말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 (예, 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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