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번째 나의 독립기념일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데미안(Demian), 악마(Daimon) 에서 비롯된 그의 이름.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 1차 세계대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정신 상담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분석 심리학이 주를 이루던 시대. 아브락사스, 에바 부인, 새는 알에서 깨어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상징들. 그리고 싯다르타. 그는 몇년 뒤에 싯다르타를 썼다. 따라가본다. 싯다르타를 주문한다. 노자의 도덕경을 같이 펼친다. 쇼펜하우어와 칼 융의 레드북을 같이 놓는다. 읽지는 않는다. 여러 책들을 올려놓고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지 기다려 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그 새, 그 새는 가끔 그 새끼가 되었다. 살아오면서 점점 나를 감싸고 있는 알이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그 새는 내면의 그 새끼와 싸웠고, 그 새와 그 새끼는 동일한 존재였다. 과거엔 편했다. '가난'을 탓하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나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고, 내가 선택하고 할 수 있었던 건, 대기업을 다니는 것. 회사에서 소시오패쓰를 만나면 그 보다 더한 소시오패쓰가 되어서, 내가 죽더라도 나를 괴롭힌 녀석은 먼저 죽이겠다는 사고를 하는 자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나는 단지 "할 수 있다" 라고 되뇌인 죄 밖에는 없었다. 스스로 되뇌인 그 다짐들이 나의 새로운 '알' 이 되고 있었음을 모르는 채.
여전히 나는 가난하다. 다만 가난의 정의가 달라졌을 뿐이다. 어렸을 적 나는 군것질 하는 돈이 아까워서 학교 운동장 구석에 있는 수돗물을 먹으며 배를 채웠다. 세계 제일의 태권도 선수가 되겠다는 일념하에 나는 먼지 털리듯 맞기도 했다. 한겨울 강원도 홍천 산기슭 아래, 계단 뛰기로 체력을 단련하며, 숲속에서 주어온 나뭇가지로 엉덩이나 허벅지를 번갈아 맞으며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운동을 하던 때가 있었다. 얼음을 깨고 팬티만 입고 들어간 채로, 얼음 속에서 3분을 버티면 눈앞의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가득했다. 허나 그런 비인간성이 새로운 인간을 보게 했다. 나는 기존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본 적이 있었다. 목이 너무 말라서 진흙이 섞인 눈을 입안에 미친듯이 쳐넣었고 스스로 기대하는 만큼 발전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박치기를 계속 하다가 이마에서 피가 흐른 적도 있었다. 피를 본 순간, 무엇인가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피를 토하는 심정은 오직 피를 토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시절을 미화하려는 건 아니다. 이미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지금의 나는 대기업 생활이 익숙해져버렸다. 주중에는 영혼을 빼고 일하고, 주말에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는다. 마음의 평온을 최우선으로 삼은 채, 안온한 하루에 안정감을 느끼는 게 하루 감정의 거의 전부인 상태. 절박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절박함이 없는 상태가 절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세계는 심리적 안정과 저항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오직 그 평화, 여전히 가난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는 낫지' 라는 그 한마디로, '나의 삶은 그래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어, 대신 그 기울기가 지수 함수에서 로그 함수로 바뀌었을 뿐이야' 라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로 자신을 달래는 데 급급하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안의 악마는 어디로 갔을까.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삶을 긍정하고 옹호하고 변명하고 긍정한다. 양극단을 오가는 삶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기성 체재를 파괴하고, 나만의 무언가를 새롭게 세우고 싶다는 그 마음은 새우 등처럼 굽었다. 내 인생의 대하드라마가 미니시리즈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불안이,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상태인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오로지 '나의 불안' 만을 글로 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불안이 존재하면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 불안하지 않으면 불안을 만들어서 글을 썼다. 특별히 인생에 불만을 갖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도 불안을 찾았다. 글을 쓰고 심신의 단련을 통해 나의 불안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나를 감싸는 사회와 세계에서 불안을 찾았다. 불안은 글의 원천이었다. 불안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나의 불안은 불안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멸한다. 불안을 마주하는 불안하지 않은 삶, 그 삶에 불안을 다시 만들어내는 순환성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여행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나의 내면에 숨겨진 목표를 내 앞에 확실히 내놓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종착지인 여행이 있다. 아직 나는 그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 나를 찾으러 간다며 떠났던 수많은 여행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나를 찾지 않았다. 불안과 불만을 나의 생각과 철학으로 포장할 수 있는 그럴듯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자아를 찾지 않고, 어떻게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어쩌면 지금의 이 글도 글쓰기 여행으로 포장된 허영은 아닐까? 아니다. 이번만큼은 다른 느낌.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나의 인생에서 '명확한 목표'는 무엇인지라는 생각만이 나를 인도하고 있다. 하나의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인도한다. 아니 인도된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어진다. 저항할 수 없는 목소리의 부름이 느껴진다.
그 목소리는 금방 사라진다. 당일까지 송부가 필요한 업무 메일과 매일 매일의 과제들. 떨어지는 주식창을 보며, 왜 지금 나는 국장이 아닌 미장을 하고 있을까, 요근래 만나는 친구들은 하나둘씩 집을 장만했다는 소식에 지금껏 스스로와 나눠왔던 대화가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과연, 자신의 의식주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사람에게 명확한 목표라는 것만큼 명확하지 않은 개념이 있을까?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의식한다. 여기서 주식창을 한번 더 보거나, 지금 모아놓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부동산 매물을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다시 집중한다. 영혼을 한 곳에 모으려고 한다. 책을 다시 펼쳐놓는다. 여전히 말을 거는 책은 없다. 무작정 책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건 아니다. 책은 하나의 세계지만, 그 세계 또한 깨고 나와야 할 하나의 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을 성장시킨 것은
지식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이었다.
내 자신의 꿈과 사상과
예감에 대한 믿음이 커졌으며,
나의 내부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일이 나에게 유익했다.
놀라우리만큼 길고도 짧은 여행이었다. 2026년 3월 1일, 3시 50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국선열의 우구충정 덕분에 나는 부끄럽게도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독립'을 생각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른 다섯의 나는, 독립은 결코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임을, 동시에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과업임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