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험 행복과 기억 행복 그리고 바다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은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서 빚어지는 묘한 긴장감의 연속으로 정의하고 싶다. 낯설다는 느낌은 이국적인 감정과 동의어라면, 익숙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게는 심(sim)카드 없이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다 발견한 맥도날드와 같다. 맥도날드는 홀로 여행을 떠난 방랑객들이 낯선 여행지에서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푯대이기 때문이다. 익숙함에서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은 역설적으로 홀로움에 이르게 된다.
혼자 여행의 장점은 홀로 어딘가를 거닐 때 문득 떠오르는 감정과 상념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년에 절반 가까이 비가 내리는 덴마크에 있다 보면, 불규칙한 수업 일정으로 공강이 길어질 때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충동은 극에 달한다.
그래서 떠났다. 하지만 이 여행에 큰 기대는 없었다. 작년에 런던, 프라하, 빈, 베를린 등 여러 유럽 도시를 여행을 해보면서 아름다운 건축물에 무뎌진 내 경험이 Flixbus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몰려왔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했던 여행 모두가 이런 긴장과 기대, 그리고 후회와 순응 등으로 이어진 감정 열차와 항상 함께 했었다.
어쨌든, 나는 떠났다. 어디로? 덴마크에서 차로 4시간버스는 환승 시간 포함하면 최소 6시간에서 최대 1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함부르크에 3박 4일 같은 2박 4일 여행을 떠났다. 혼자 갖고 있던 독일에 대한 환상이 한 몫 했다. 그렇게 함부르크에서의 장밋빛 여행과 행복 탐구가 시작되는 듯했다.
참치로 유명한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의 말씀이다. 해외탐방 프로그램에 당선되었을 때 들었다. 솔직히 처음엔, 이 말을 듣자마자 ‘이게 바로 유명한 그 꼰대(?)의 전형적인 문장’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생활할수록 참으로 통찰력 있는 문장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유럽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시민들의 대중교통 문화는 거의 최악이다. 먼저,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은 채 노래를 듣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더욱 이해가 안 가는 건 누구 하나 제지하거나, 말을 걸어 이어폰을 사용하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국경을 가로지르는 버스에서도 말이다. 모두가 "I don't give a shit"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독일의 경우, 지하철(S-bahn, U-bahn 등)을 이용하면서, 객실 내에서 맥주 마시는 사람을 여러번 봤다. 플랫폼은 깨진 맥주병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고, 출구 앞 계단에 졸졸 흐르는 물은 맥주와, 지하철역 입구 공중화장실에서 새어 나온 액체가 섞여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특히, 독일은 무임승차로 인한 피해와 무분별한 난민 유입으로 인해 상징과도 같았던 ‘Organized’ 이미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함부르크는 독일 제2의 도시이자 독일의 최대 항구도시기에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바다로 향했다. Hafencity까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답답하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바다를 찾을까'
순천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파도는 바다의 숨소리다." 바다 앞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는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물과 물, 바람, 갈매기와 물고기들이 나와 공명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내 날숨과 들숨이 짠 바닷바람과 만날 때면, 내 기분은 오히려 달달해진다. 그러면서 가슴이 열린다. 그 바람은 생각의 기도를 타고 올라가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준다. 바다는 누구나 받아준다.
바다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밤에는 야경이라는 또 다른 멋을 잔잔한 수면 위에 비춘다. 어느새 바다는 각자의 인생을 관조하도록 하는 거울이 된다. 특히 여행을 혼자 하면서 호사를 누릴 때면 생각의 고리는 반사와 굴절을 반복하며 다음에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고 싶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 지금 느끼는 이 감정들을 잇고 싶은 만큼 사진을 찍어본다. 동영상으로 기록하고, 글로 다시 음미하여 순간의 소중한 생각과 느낌을 붙잡기 위해 헤엄치게 만드는 곳, 일상에 지친 호흡을 가다듬는 곳, 이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내겐 그곳이 바다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Old warehouses(UNESCO world herigtage), hafencity, Landungs-brucken)
보통 바다에서 받은 생각들의 도착지는 ‘그래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인생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편집. 인생은 편집이다. 특히, 여행에서 인생의 편집성은 극대화된다. 필터 앱으로 사진을 찍고, SNS에 사진을 올릴 때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편집의 정수다. 우리는 왜 그럴까? (SNS가 발전해서, 타인을 더욱 신경 쓰는 '전시 욕구' 발현의 결과라든지, 디지털 나르시시즘의 산물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여행을 떠나기 전, 행복 연구의 일환으로 대니얼 커네만(행동경제학자, 노벨상 수상자)의 [The riddle of memory and experience] TED 강연을 봤다. 연사는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기억 주체 (Remembering self)와 경험 주체 (Experiencing self). 그리고 연사는 두 개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기억 존재의 관점에서 행복을 판단하는 건 다음과 같다. "얼마나 그들이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여기는가? 다만, 그게 곧 경험 그 자체가 행복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런 얘기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왜 우리는 멋진 광경을 눈으로 담지 않고,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데 급급할까, 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는 대니얼 카네만의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그건 우리의 행복 관념이 전적으로 기억 주체의 관점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 지내면서 느끼는 사실 중 하나는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휘게’(Hygge)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은은한 조명에 친구 또는 가족과 얘기하며 여유롭게 시간 보내는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강연자의 말처럼,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에서부터 행복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기억과 믿음이 경험을 선행하게 되는 것이다.
"We should not think happiness as a substitute for well-being, it is a completely different notion. The experiencing self is not going to be happier if they move to where they wanted to live but one thing will happen, they will think they will be happier."
무드셀라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쉽게 말하면 과거 미화 현상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좋았던 기억들만 간직할게~"와 같은 흔한 이별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우리는 왜 여행이 일상보다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경험 그 자체가 흥미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기억하고자 하는 나라는 기억 주체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행복할 자신의 모습을 이미 상상하거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래도 알차고 즐거웠던 여행이었다”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우리의 모습은 경험행복과 기억행복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그 자체다.
덴마크로 돌아온 나는 함부르크 여행이 재미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좋지 않은 경험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함부르크 바다에 묻어두고 왔다. 여행도 매번 행복할 수는 없다. 일상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바다는 지혜의 산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