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는 낯선 듯 다가와, 불편한 듯 편해졌다

<아이들과 함께 떠난 치앙마이 2주 여행> 10편

by 최성희

빠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한바탕 추운 물놀이를 기어코 해낸다. 2월 초 빠이의 날씨는 낮에는 더워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서 물놀이를 하다 보면 금방 추워진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물만 보면 망설이지 않고 풍덩풍덩 뛰어들었고, 한참을 물개가 되어 물속에서 행복해했다.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의 환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나의 고민도 사소하게 무색해지곤 한다.

오후 5시쯤 일몰 명소로 유명한 카페인 ‘투 헛츠 빠이(Two Huts Pai)’로 향했다. 도착하니 주차장은 오토바이로 가득 차 있고 야외인데도 사람이 무척 많아 복잡했다. 여행지에서 사람이 몰리는 명소는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관광지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음식과 음료를 계산하러 카운터에 갔다. 정신없이 주문을 마치고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서 있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과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연주와 노랫소리, 그리고 수많은 여행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매료된 것이다.

음료가 준비되었다는 진동벨의 울림에 멈춰있던 몸을 깨워 다시 움직였다. 넓은 야외에 마련된 자리가 많았음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앉을만한 곳은 없어 보였다. 내가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잡으러 갔었기 때문에, 아직도 자리를 못 잡은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음료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들판으로 향했다. 저 멀리 사람들이 거의 없는 외진 곳에 남편과 아이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돗자리를 하나 깔고 이미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어떤 여행자들보다 여유로운 모습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돗자리는 카페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게 구비해 둔 것을 남편이 발견한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의자보다 훨씬 좋은 선택지였다. 아직 나오지 않은 음식을 기다리며 하늘이 붉은 노을로 아름답게 물드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일몰 명소가 많기 때문에 빠이의 일몰이 특히 더 아름다울 건 없었다. 다만 수많은 여행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그 특유의 분위기는 빠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뒤늦게 나온 음식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해가 완전히 산 뒤로 넘어가 깜깜해질 때까지 우리 네 가족은 ‘투 헛츠 빠이’를 충분히 천천히 즐겼다. 우리만의 작은 공간이었던 돗자리 위에서, 나란히 누운채로 밤하늘의 별을 한참을 바라본 뒤에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남편의 배려로 혼자 마사지를 받았고 그동안 아이들은 빠이의 한 놀이터에서 놀았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현지인 친구 1명을 만나 같이 신나게 놀았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는데도 한참을 까르르 웃으며 놀았다며 남편이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영상 속 세 아이는 정말 재밌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불편하고 빠이라는 지역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온 여행지인데 도대체 왜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젊은 서양 여행자들 특유의 자유로움 앞에서 내가 한없이 보수적이고 작게 느껴졌던 것 같다. 게다가 어두운 저녁에 야시장에도 가볼 겸 여행자 거리에 나가보니 한집 건너 한집은 타투 가게나 대마를 파는 곳이었다. 아이들까지 데려왔는데 이게 맞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았다는 놀이터 앞에도 힙한 가게들이 늘어서있길래 점심이나 먹을까 해서 들여다보니 다 대마 표시가 반짝이고 있어서 서둘러 방향을 틀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아닌 곳도 많았는데, 당시 내가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는지 그런 것만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그저 가는 곳마다 신기하고 재밌는지 반짝거리는 눈빛은 지칠 줄을 몰랐다.


다행히도 나의 긴장을 풀어주는 곳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한 곳은 우리가 빨래를 맡긴 가게였다. 숙소 근처를 지나가다가 laundry service를 제공한다는 간판이 있어 갑자기 빨래를 맡겼는데 기계로 빨래를 건조하는 것이 아니라 ‘Sun dry’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설마 빨랫줄에 빨래를 말려주는 서비스일까 싶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맞은편 공터에 대나무를 세우고 이어서 만든 넓은 빨래건조대가 있고 옷가지들이 널려있었다. 신기하면서도 사람 냄새나는 장면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엄마 또래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물건을 파는 가게이자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고, 태양 아래에 옷을 말려주는 빨래방이었다. 우연히 만난 빠이 멀티샵. 나중에 저녁도 먹으러 들렸는데 가족 사업으로 모든 직원이 사장님의 지휘아래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왜그리도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청결과는 거리가 먼 노상이었지만, 음식 가격이 굉장히 저렴했고 양은 푸짐했다. 빨래를 맡긴 우리를 기억해서인지 사장님께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옆집 아줌마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실 낯설고 불편했던 감정은 나의 편협한 생각과 편견에서 나온 것이었다. 빠이 일정의 딱 절반이 지나자 편견이 걷히며 진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나고 보니 안 그래도 짧은 빠이 여행 일정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음을 열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서 빠이가 더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글에서는 계곡처럼 되어있는 자연 속 천연 온천과 또 다른 일몰 명소 ‘빠이 캐년’에 다녀온 여행기를 글로 써 내려갈 예정이다. 그렇게 빠이에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질 테니 이 글만 읽고 빠이에 오해를 사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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