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떠난 치앙마이 2주 여행> 4편
나는 판단형(Judging) 인간이다.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J가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J의 반대 성향인 P, 인식형(Perceiving)은 유동적인 목적과 방향을 선호한다. 체계는 없지만 자율적이고, 상황에 따라 일정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성향이다. 평소에 늘 계획적으로 지내다 보니,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만큼은 P처럼 하고 싶었다. 그게 마음먹는다고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늘 ‘P의 여행’을 꿈꿔왔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J의 여행’이었다. 일정표를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작성해서 도장 깨기 하듯이 다니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은데,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행을 떠날 때마다 밤을 새우며 정보를 검색하고, 가고 싶은 곳을 물색하고, 언제 어디로 갈지 세세하게 계획을 짜고 있는 내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특히 여러 사람을 이끌고 다녀야 하는 여행이면 더욱 그렇다. 어디서든 예고 없이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 수 있는 아이들,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면 더더욱. 마치 내가 여행사 직원이 된 것처럼 고객님들이 만족해할 만한 코스를 어찌나 잘 짜는지, 그리고 현장에서 누구보다 즐거워하는 고객님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쁘고 만족스러운지, 가끔은 여행 가이드를 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아이들이 이제는 7살, 5살. 길에서 대자로 뻗어 우는 일은 거의 없고, 웬만한 건 말로 타협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 넷만 떠나는 여행이기에, P처럼 즉흥적으로 다녀도 좋을 것 같았다.
2주간의 여행 중 치앙마이에서의 첫날, 숙소 앞 님만해민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얼마나 더 계획 없이 걸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며 J 성향이 나와 슬슬 불안해지려던 찰나에, 감사하게도 딱 나타나 준 빵집.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여행을 기록할 생애 첫 필름 카메라를 건넸다. 또 꽤 많이 걸어 도착한 대형 쇼핑몰에서는 한국에서 챙겨 오지 못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길거리에서 책방이 보이면 들어가 그림책을 하나 사기도 하고, 아무 노점상에 들어가 카오쏘이(Khao Soi, 태국 북부 지역에서 유래한 전통 국수 요리)로 점심을 해결했다. 맛이 조금 아쉽긴 했으나, 노점상 특유의 분위기와 저렴한 가격이 좋았고, 낯선 치앙마이의 음식 문화를 접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미리 알아봤으면 더 맛있는 점심을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P처럼 여행하기로 결심했으므로 그런 생각은 접었다. J에게는 이 정도로도 이미 충분히 ‘즉흥적인 하루’였다.
만족스러운 반나절을 보낸 뒤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무더운 태양을 피해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둘째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끼는 인형을 잃어버렸단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또다시 밖으로 나가 ‘인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으로 걸어갔다. 더운 날씨에 이렇게 가서 찾으면 다행이지만, 못 찾으면 화가 날 것 같았다.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하니 마음이 절로 불편해지고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른다.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노력으로 힘겹게 끌어와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데, 남편과 아이들은 매우 편안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인형이 없어졌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둘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하호호 웃으며 오빠 손을 잡고 신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인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 때문인지, 잠깐 인형 분실 사건을 잊은 건지, 지금 걷고 있는 이 거리의 분위기가 좋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둘째가 부러웠다. 그때의 나는 인형을 잃어버려 불편해진 하나의 감정을 쭉 끌고 가고 있었고, 인형을 못 찾으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는 미래의 걱정을 현재로 끌어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남편과 아이 둘, 그 세 명의 여유와 단순함을 본받고 싶었다. 그들 덕분에 무더운 날씨의 치앙마이 길거리를 어느새 4명 모두 웃으며 걷고 있었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중 하나는 지금 현재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좋아하는 놀이에 마음껏 집중하고, 찬찬히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내 살결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흔들리는 나뭇잎의 아름다움에서 행복을 찾는 아이들.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나중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분위기에 푹 빠져 젖어드는 것. 그런 능력이 나를 더 살아 있게 만들고 내 삶을 풍부하게 한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다행히 우리는 인형을 찾았다. 못 찾았어도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J니 P니 여행의 방식을 따지는 것은 잠시 멈추기로 했다. 대신 최대한 순간을 즐기고 현재의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2주간의 치앙마이 여행 중 첫날부터 아이들은 이미 그렇게 여행에 임하고 있었다.
“시간을 진짜로 느끼는 법은 단 하나뿐이야.
그건 바로 지금을 사는 것.”
— 미하엘 엔데, 『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