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봉
장소 :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제주항~사라봉동길~사라사)
제주항에 어둠이 살며시 스며들기 시작하면, 사라봉 등대는 말없이 하루의 끝을 준비한다. 낮 동안 둘둘 말아 숨겨 두었던 붉고 고운 비단을 꺼내, 조심스럽게 풀어놓는다.
가장 먼저 하늘에 머물던 구름 하나하나가 그 비단으로 갈아입는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붉은 비단으로 가득 찬 하늘은 구름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그 빛은 제주항으로 내려와 물결 위에 차례로 깔리고, 제주항 앞바다도 고요히 붉은 주단을 입는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흐려지고, 세상은 잠시 붉으면서 예쁜 색으로 숨을 맞춘다.
그제야 밝은 해는 제주항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사라봉에 내려앉는다. 붉은 주단 위에서 해는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끼듯 장난을 친다.
이쪽 나무 끝에 머물다 금세 다른 나무로 옮겨 가며 숨바꼭질을 한다.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웃음처럼 번지고, 그 순간은 짧지만 유난히 선명하다.
그러나 장난의 끝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밝던 해는 미련을 접듯 천천히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붉은 주단은 조용히 거두어진다. 빛은 파도 속으로 잠기고, 제주항에는 하루가 지나간 후 고요만이 남는다.
그렇게 제주항의 저녁은 아무 말 없이 하루를 접고, 또 하나의 밤을 부드럽게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