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기암절벽, 영실을 오르다
< 영실코스 입구 >
영실코스는 계절마다 특색 있는 매력을 선사한다. 겨울에는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상고대와 설경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든 영실계곡이 멋있으며, 봄에는 선작지왓의 선홍색 철쭉꽃이 예쁘다. 그리고 오백나한, 병풍바위와 같은 기암괴석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전 7시 30분 인데도 차량 정체가 심하다. 영실코스는 인기가 많은 관광지라서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주차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주차장은 매표소와 등산로 입구에 각각 있고, 매표소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1.5km 정도 된다. 그래서 영실코스를 완주하거나 등산 초보자의 경우는 등산로 입구에 주차하는 것이 좋다. 다만, 시간이 있으면 가을에 이 구간을 천천히 걸으면서 단풍을 만끽하는 것도 좋다.
등산로 입구는 해발 1,280m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서 병풍바위까지는 1.5km, 병풍바위에서 윗세오름 휴게소까지는 2.2km, 휴게소에서 한라산 남벽 분기점까지의 거리는 2.1km이다. 병풍바위까지 올라가는 등산로는 급경사이고, 대부분 나무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가장 힘든 코스이다. 나머지 구간은 평지이거나 완만한 경사이므로 걷기에 어렵지 않다.
< 병풍바위 & 오백나한 >
영실코스 입구는 완만한 숲길이다. 걷다 보면 좌측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발 약 1,200m 되는 높은 지대임에도 '콸! 콸! 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우거진 소나무 숲, 시냇물 소리, 산새 소리,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 등산객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곧이어 웅장한 병풍바위가 눈앞에 펼쳐진다. 급경사가 시작되는 곳에서 병풍바위를 바라보면 그 험준한 등산로를 올라갈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해진다. 능선 끝자락의 사람들이 개미행렬처럼 작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급경사를 오르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에 취해 힘든 줄도 모르게 된다. 등산로 오른쪽으로는 깊은 영실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병풍바위가 우뚝 서 있다. 병풍바위를 따라 듬성듬성 솟아 나온 오백나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다. 오백나한이란 불교용어이며, 깨달음을 얻어 존경과 공양을 받을만한 500명의 성자를 말한다. 제주도에서는 영실기암이라고 부르는 병풍바위를 일컫기도 한다.
이 구간을 오르면서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 한라산 중산간지대의 오름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제주 앞바다까지 보인다. 탐방로 중간중간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나무 데크 겸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영실계곡과 병풍바위를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다.
< 족은윗세오름 >
험준한 병풍바위 능선을 지나면 드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곳은 선작지왓이라 불리며, 윗세오름까지 약 2~3km 이어진다. 등산로는 나무 데크로 잘 조성되어 있으며, 최근 보수를 거쳐 아주 깔끔한 상태이다.
산책로 양옆으로는 작은 조릿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사이로 철쭉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5월 말에 절정을 이룬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온통 철쭉 꽃밭이었다고 한다. 조릿대가 점점 퍼져나가면서 철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곳은 여전히 철쭉꽃으로 가득하여 멋있다. 등산객들이 철쭉꽃을 더 잘 감상할 수 있도록 산책길 오른편에 넓은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 데크 주변에 철쭉꽃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철쭉꽃 너머로 한라산 북벽이 웅장하게 병풍역할을 하고 있어 더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진다.
철쭉꽃 사이로 바라보이는 한라산 정상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드넓은 평지에 조릿대와 철쭉꽃이 펼쳐진다.
이곳을 지나 300~400m 걸으면 좌측으로 족은윗세오름이 나온다. 드넓은 평지에 우뚝 솟은 이 오름은 눈에 잘 띈다. 오름 꼭대기까지 나무계단으로 잘 조성된 산책로가 있으며, 이곳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 좌측으로 드넓은 평지(만세동산)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미국 서부영화에서 총잡이들이 널따란 초지에 말을 타고 달릴 법한 이국적인 풍경이다.
오름 정면에는 윗세누운오름이 있고, 그 너머로 한라산 백록담의 북벽이 병풍처럼 높이 솟아 있다. 족은윗세오름과 누운오름은 나무가 없고 조릿대만 무성하다. 멀리서 보면 드넓은 초지를 연상시킨다.
오름 우측으로는 선작지왓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귀포 시내와 바다가 보인다. 드넓은 평지가 끝나는 지점에 커다란 낭떠러지가 있어, 마치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서귀포 바다로 떨어질 듯한 느낌을 준다. 오름 뒤쪽으로는 제주 시내가 보이며, 크고 작은 건물들과 아파트가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는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마라토너들이 이곳에서 만세동산 끝자락까지 달리다 보면 큰 절벽을 만나고,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제주 시내 한복판에 도달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곳은 한라산 정상, 제주 시내와 서귀포 시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된다. 제주에서 서귀포를 가려면 승용차로 1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눈을 1~2초만 돌리면 모두 볼 수 있다.
족은윗세오름에서 500m 정도 걸어가면 노루샘이 나온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온 ‘노루가 물을 마시는 곳’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샘에서는 여전히 물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현재는 마시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이곳에는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서 200~300m를 더 가면 윗세오름 휴게소에 도착한다.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길은 영실코스, 어리목코스, 돈내코 등 3개가 있다. 각 코스의 길이는 비슷하지만, 각각의 특색이 있다. 영실코스는 병풍바위와 선작지왓이 있어 멋있고, 어리목코스는 숲길과 만세동산이 이어져 평안하며, 돈내코코스는 서귀포 앞바다를 뒷배경으로 걸을 수 있어 좋다.
< 윗세오름 >
선작지왓-족은윗세오름-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해발 1,700m에 위치해 있는데도 주변이 모두 평지여서 높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평지와 오름 주위에는 조릿대가 자라고, 그 조릿대 사이로 듬성듬성 철쭉꽃이 피어있다. 그리고 설앵초, 흰그늘용담 등 한라산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그래서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설앵초는 제주도 등 우리나라 고산지대에서만 자생하며, 5~6월 옅은 자주색, 분홍색, 연보라색, 빨간색의 꽃이 피고, 꽃말은 ‘신뢰, 믿음, 인내’라고 한다.
흰그늘용담은 제주도 1,500m 이상 고지인 윗세오름, 선작지왓 일대에서만 자생하고, 꽃은 그늘이 아닌 햇살 가득한 양지에서 자란다. 5~7월 하얀색 꽃이 피고, 꽃말은 ‘긴 추억’이라고 한다.
윗세오름은 족은웃세(족은윗세오름), 샛웃세(누운윗세오름), 큰웃세(붉은오름)의 세 개의 오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윗세오름은 이중 큰웃세오름을 지칭하며, '족은'은 작다는 의미, '샛'은 중간에 끼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단다. 예전에는 이곳이 방목지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망오름'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윗세오름의 큰 봉우리인 붉은오름과 가운데 봉우리인 누운오름 사이에는 윗세오름 휴게소가 있다. 이렇게 둘러싸여 있어 마치 커다란 분화구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윗세오름 휴게소에는 휴게소 본 건물과 화장실 등 2개 동의 시설이 있다. 휴게소 앞에는 등산객들이 쉬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이곳에서 먹는 컵라면이 일품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컵라면을 판매했지만, 현재는 물품 판매 없이 휴게소로만 운영되고 있어 컵라면은 등산객들이 직접 준비해야 한다.
< 한라산 남벽 분기점 >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돈내코 방향으로 약 2.1km를 걷다 보면 한라산 남벽 분기점이 나온다. 편도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등산로 좌우로는 조릿대가 있는 평지와 잡목이 우거진 숲길이 번갈아 나온다. 걸으면서 한라산 백록담의 북벽, 서벽, 남벽을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한라산 남벽은 화산폭발로 형성된 백록담의 둘레 1.7km, 너비 0.2km의 외곽 화구벽 중 남측 수직 절벽을 말하며, 해발 1,280m에 위치해 있다. 백록담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각각 다르다. 북쪽에서는 항아리 모양이고, 서쪽에서는 높고 길게 쌓은 옹벽 같고, 남쪽은 봉긋 솟은 원추모양이다. 한라산 남벽 아래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900m)에 있는 슬픈 사연을 가진 무덤이 있다. 1982년 대학생 부부가 신혼여행 중 실종되어 이곳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운송수단 부족으로 가족들이 이곳에 돌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까지의 탐방로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그러나 남벽 분기점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자갈밭이고,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쬐므로 힘들 수 있다. 특히 자갈로 조성된 탐방로는 등산화를 신었어도 발바닥이 아프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날이라도 멋진 풍광을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은 있다.
9시에 탐방로 입구를 출발하여 병풍바위, 선작지왓, 족은오름, 윗세오름, 노루샘, 윗세오름, 남벽분기점으로 이어지는 왕복 코스(편도 4.5km)를 선택했다.
9월 말의 영실코스는 녹음 짙은 영실계곡, 중산간지대 오름군과 흰 구름이 둥두실둥실 흘러 다니는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먼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탐방로 입구부터 숲과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최근 많은 비가 내려서인지 등산로 좌측으로 이어지는 계곡에는 청량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졸! 졸! 졸!', '콸! 콸!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걸음이 가볍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인지 등산로에는 사람들이 많다.
계곡을 지나 병풍바위까지는 나무 계단이 급경사로 이어진다. 한 발 한 발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병풍바위가 눈앞에 펼쳐진다. 등산로를 따라 오른쪽 영실 계곡의 오백나한 바위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맑은 날이라 뷰가 좋다. 뒤로는 제주 서부 중산 간 지대의 오름 군이 펼쳐지고, 비양도, 차귀도, 산방산 등이 아스라이 나타난다. 이러한 풍경들 덕분에 기나긴 급경사의 탐방로를 오르더라도 눈이 즐거워 덜 지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놓인 탐방로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숲을 이룬다. 숲이 따가운 햇볕을 가려준다. 이곳부터는 평지라 걷기도 편하다.
숲을 나오면 선작지왓에서 시작해 윗세족은오름, 윗세누운오름, 노루샘 및 윗세오름까지 평지가 길게 펼쳐진다. 봄에는 철쭉이 만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윗세누운오름 너머로 펼쳐지는 한라산 정상 풍경은 백미이다. 높이가 높아 흰 구름이 한라산 정상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사진으로 찍힌 풍경보다 눈으로 직접 보는 풍경이 더 멋있다.
인부들이 윗세족은오름에서 윗세오름까지 탐방로를 새롭게 조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화창한 날, 게다가 휴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등산객들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고맙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수월하게 등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노루샘을 지나 윗세오름 휴게소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휴게소의 넓은 들판에 앉아, 각자 가져온 음식과 음료를 즐기고 있다. 일부는 윗세오름이 새겨진 바윗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윗세오름을 지나면 왼쪽으로는 조릿대로 뒤덮인 장구목오름이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며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조릿대가 가득한 웃방애오름이 솟아 있다.
윗세오름에서 한라산 남벽 분기점까지의 2.1km 구간은 대부분 평탄하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북쪽, 서쪽, 남쪽 방면의 특색 있는 백록담 모습을 각각 볼 수 있다. 어느 방면에서 보더라도 웅장하다.
영실코스를 오르는 사람 대부분은 윗세오름까지 왔다가 돌아간다. 그래서 남벽 분기점까지의 길은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롭고 고요하다. 이 구간은 등산로 양옆이 평지여서 강한 햇볕을 직접 맞게 된다. 모자를 쓰고, 선크림도 준비를 해가야 한다.
영실 계곡의 단풍은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주 방문했을 때는 단풍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5시 20분쯤 등산을 시작했다. 주변이 아직 어두워 헤드렌턴이나 휴대용 렌턴으로 등산로를 밝히며 걷는 사람이 많았다.
입구에 조성된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1차 고 바위를 올라서면 영실 능선이 시작된다. 어슴프레 대정읍과 서귀포 시내 방면에서 불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실 계곡의 오백나한 바위 주변이 해가 뜨려는 듯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드넓은 선직지왓이 나타난다. 해가 이미 높이 솟아 있다. 한라산 북벽에서 서귀포 방면까지는 흰 구름이 펼쳐져 있다.
선직지왓의 넓은 평지에 윗세족은오름, 윗세누운오름과 항아리 모양의 백록담 북벽이 나타난다. 이런 멋진 풍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영실 코스를 찾는 것 같다. 제주도에 4~5년 거주했는데도 영실코스를 처음 등반한 동료들이 선직지왓에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동료들이 다양한 음식을 준비해 왔다. 삶은 돼지고기, 직접 내린 원두커피, 컵라면 등이다. 한라산을 오를 때마다 부러워하던 컵라면도 드디어 맛보았다. 이제 한라산 남벽분기점으로 향해 다시 출발했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 왼쪽에는 능선으로 연결된 장구목과 우뚝 솟은 백록담 북벽이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방애오름 등 조릿대로 덮인 부드러운 곡선의 언덕이다. 장구목오름이나 방애오름 등 주변 오름 대부분이 조릿대로 덮여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고운 잔디를 입힌 삼국시대 커다란 왕릉과 같아 보인다. 아름다운 오름 능선과 한라산 북벽 등 멋진 풍경에 눈이 즐거워진다.
남벽 분기점 근처에서는 조릿대 제거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선작지왓과 남벽분기점 주변에는 5-6월에 철쭉꽃이 만발해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조릿대 자생지가 철쭉 꽃밭까지 침범해 그 아름다운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조릿대를 베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벽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그곳 나무 데크에서 배낭에 등을 기대어 편안한 자세로 한라산 남벽을 바라본다. 정말 웅장하고 멋진 풍경이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동료들은 제주도에서 4년을 살면서 이런 멋진 풍경은 처음 봤다고 한다. 되돌아오는 길도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힘들지 않았다.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영실계곡을 통해 내려왔다. 올라오는 길에는 어두워 보이지 않던 영실 계곡이 이제는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제주도에서 설악산이나 내장산에서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단풍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제주도는 기온 차가 적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영실코스가 단풍으로 유명한데, 진빨강색보다는 진갈색의 단풍이다.
이곳은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므로 나름 단풍을 구경할만하다. 진녹색의 상록수, 옅은 갈색과 진갈색의 단풍나무가 섞여서 조화를 이룬다.
하얀색 여우인지, 강아지인지 한 마리가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다. 물들어 가는 가을,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여유를 즐기는 듯하다.
< 오백나한 & 선작지왓 & 윗세오름 >
제주 시내 숙소를 출발해 영실입구 주차장까지는 대략 50분이 소요된다. 숙소에서 연삼로를 따라 1.5km 지점에서 좌회전하면 오남로가 나온다. 오라교차로에서 우회전하고, 애조로를 따라 노형교차로까지 가서 좌회전한 후 1100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1100도로를 따라 어승생 삼거리, 어승생 제2저수지, 1100 고지 습지, 어리목을 차례로 지나 영실삼거리에 도달하게 된다. 영실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약 5km를 올라가면 주차장 입구가 나온다. 1,800원의 주차료를 내고 약 1.5km를 더 올라가면 영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새벽길이라 1100 도로는 차량 한 대 없이 적막하다. 이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고, 숲길이라 더 어두워 40km 이상 속도 내기가 어렵다. 영실주차장 입구에 새벽 5시 15분에 도착했는데 차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 5시 30분까지 기다려야 했다. 잠시 차에서 내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5시 30분이 되어 요금소가 열리자 영실코스 입구까지 이동해 주차한 후, 5시 38분경 산행을 시작했다. 주변이 캄캄해서 휴대폰의 후레쉬를 켜고 걸었다.
영실코스 중턱에 다다르자 서서히 새벽이 밝아온다. 우측에는 영실계곡과 계곡 건너편 오백나한 바위가 보인다. 그 너머 서귀포 앞바다 범섬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뒤로는 애월읍의 삼형제오름, 노로오름, 큰노꼬매, 큰바리메 등 익숙한 오름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그 너머로는 산방산, 비양도, 차귀도까지 보인다.
등산로 입구에서 선직지왓에 이르는 등산로가 제주도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해돋이를 볼 수 없다. 선작지왓까지 서둘러 걸었다. 한라산 정상 방향을 바라보니, 해가 떠오르려는 듯 붉은 노을이 비친다.
선작지왓을 지나 족은윗세오름에 오르니, 북쪽은 제주 시내, 남쪽은 서귀포 시내, 서쪽에는 산방산과 애월읍 중산 간 지대 오름군, 동쪽에는 한라산 북벽이 번갈아 가며 눈에 들어온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씨 덕분에 주위 풍경이 선명하다.
윗세오름휴게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지고 간 사과, 바나나 등을 먹고 난 후 어리목입구 방면으로 향했다. 특색 있는 풍경을 보기 위해 영실에서 출발하여 어리목으로, 돈내코에서 출발하여 영실이나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다수 있다.
< 만세동산 >
윗세오름에서 출발해 만세동산까지는 20~30분 소요된다. 이곳 만세동산은 드넓은 평지이다. 우측에는 알프스 언덕을 닮은 민대가리오름, 좌측에는 윗세족은오름과 윗세누운오름, 그리고 뒤쪽에는 백록담 북벽이 위치해 있다. 그 사이로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풍경이 이색적이면서 멋있다. 게다가 이 넓은 평지에 조릿대와 풀은 누렇게 물들어 있고, 여전히 진녹색으로 우뚝 솟아있는 구상나무들이 듬성듬성 군락을 형성하고 있어 경치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든다.
윗세오름에서 만세동산 전망대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마치 시골길처럼 정겹다. 뒤로는 우뚝 솟은 한라산 북벽이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며, 부드러운 능선을 지닌 민대가리오름과 장구목 오름 등이 친근함을 더한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윗세오름 휴게소 증축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들이다. 대부분 젊은 외국인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편하게 산행할 수 있는 것은 이분들의 수고로움 덕분이다. 한편으론 고마운 마음이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머나먼 이국에서 힘든 일을 하고 있다는데 안타까움을 느낀다. 무거운 물건을 나르고 아침 추위까지 견뎌내야 하는 힘든 일이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하다.
만세동산에 도착해 주변 풍경을 둘러보니, 오른쪽에는 제주 시내가, 왼쪽에는 산방산과 차귀도가, 정면에는 애월읍 중산간 지대의 오름군과 비양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세동산과 민대가리오름 사이 계곡에는 활엽수들이 많지만,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제주도에서 단풍으로 유명한 이곳의 풍경을 만끽할 수 없어 아쉽다.
날이 밝아오면서 어리목 코스에서 출발한 등산객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윗세오름 휴게소 방향에서도 몇몇 팀이 내려온다. 윗세오름 휴게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다섯 번째 방문이다. 영실코스는 병풍바위와 오백나한 등 기암괴석과 고산지대에 펼쳐진 넓은 평지인 선작지왓, 웅장한 백록담 등을 볼 수 있어 어느 때 찾더라도 좋은 곳이다. 하지만 계절마다 풍경이 아주 다르므로 시기를 달리하여 찾는 것도 좋다.
영실코스는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봄에는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화려한 철쭉꽃이 핀다. 여름에는 녹음 짙은 한라산 중간간지대의 아기자기한 오름군을 볼 수 있다.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든 영실계곡을 만날 수 있다. 겨울에는 하얀 눈꽃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영실코스는 영실기암, 고산지대 평지인 선작지왓, 웅장한 백록담 등 볼 것이 많다. 그래서 시기를 정하지 않고 방문해도 좋다. 또한,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추위가 시작되고, 월요일이라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휴일에는 대부분 오전 7시만 되어도 주차장이 만차이다.
특히 등산로 입구 주차장은 더 빨리 들어차기 때문에 가능한 입산 가능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등산로 입구에서 2~3km 떨어진 존자암 입구 주차장에 주차 후 택시를 타고 가거나, 도로 양옆을 따라 걸어야 한다.
이마저도 오전 9시 이전에 모두 들어찬다. 때론 5km 더 떨어진 1100도로와 영실로가 만나는 영실입구삼거리부터 정체되기도 한다.
영실코스를 처음 탐방했던 지난 5월, 그 경치에 압도당하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 다섯 번째 방문이어서 처음의 그 감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탐방로 뒤쪽으로 펼쳐지는 중산간 지대의 오름군과 산방산, 마라도, 가파도 등을 볼 수 있어 좋다.
탐방로 초입에 급경사가 있어 다소 힘들긴 하지만, 20~30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앞뒤로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가족 단위의 등산객이 많다.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70~80대의 할아버지, 40~50대 부모, 10~20대 자녀로 구성된 3대가 함께 등산하는 모습이 보인다. 걸음이 느린 할아버지를 위해 천천히 뒤따르는 그 가족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