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고산지대의 웅장한 초원을 만나다_ 어리목코스
한라산을 제대로 등반할 수 있는 코스는 총 5개가 있다.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는 한라산 백록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어리목 코스, 영실 코스, 돈내코 코스는 윗세오름과 한라산 백록담 남벽 하단까지 갈 수 있다. 예전에는 이 코스에서도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한라산 생태 보호를 위해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어리목 코스는 한라산을 찾는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제주 시내에서 가깝고, 상대적으로 오르기 쉬워서 이다.
입구에서 약 500m 정도는 평평한 숲길이다. 널빤지로 조성된 이 길 양옆으로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조릿대가 자라고 있다. 평평한 숲길을 지나면 어리목 계곡이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약 2km의 오르막 숲길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등산로 중간중간에 잠깐 앉아 쉴 수 있는 나무 의자와 평상이 설치되어 있다. 숲길이 끝나면 사제비동산이 나오며, 등산로 양옆에는 조릿대로 덮여있다. 사제비동산에 있는 사제비 샘에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실 수 있다.
사제비동산과 만세동산이 만나는 지점에는 전망대가 있다. 뒤로는 큰노코메오름, 큰바리메오름 등 애월읍 중산 간 지대의 오름이 보인다. 앞에는 한라산 정상의 북벽과 민대가리오름, 장구목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이 한라산 정상까지 이어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만세동산은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코스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좌측으로 민대가리오름과 장구목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이 1~2km 길게 이어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족은윗세오름과 윗세누운오름이 언덕을 형성하고 있다. 앞에는 웅장한 백록담 북벽이 병풍처럼 서 있다. 이곳을 지나면 윗세오름과 남벽분기점이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나오는 알프스 고산지대의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베르펜의 초원)를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말괄량이 수녀 마리아와 본 트랩 대령의 아이들 7명이 드넓은 초원에서 도레미송을 부르는 영화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도레미송을 들어본다.
때론 서부영화 속 주인공이 말달리고 있을 법한 드넓은 들판 연상된다.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말안장에 앉아 빠른 속도로 달리는 보안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편으론 깊은 산골마을에 있는 오솔길 같아 보인다. 때론 어렸을 적 친구들과 뛰어놀던 들판이 된다. 때론 읍내나 시내로 장 보러 가는 어머니 뒤를 따라가던 아이들 모습이 떠오른다. 이 넓은 들판에 서 있으면 그간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다양한 추억들이 연상된다.
연두색의 조릿대가 잔디밭을 만들고,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구상나무는 숲을 만들며, 웅장한 백록담은 커다란 옹벽을 만들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해발 1,400m보다 높은 이곳에 약 2~3km 이어진다. 좌측에는 민대가리오름과 장구목오름의 능선, 우측에는 족은 윗세오름, 누운오름, 윗세오름, 붉은오름이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어 이곳 등산로는 마치 물이 흐르는 계곡처럼 느껴진다.
이곳에는 구상나무와 주목 군락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한그루 한그루가 멋있게 보인다. 크기는 아담하지만,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이다.
때론 앙상한 뼈대만 남기고 고사한 구상나무가 눈에 띈다. 한라산 고산지대에서 모진 풍파를 견디어 내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비록 고목이 되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형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데 위안을 삼아 본다.
< 어리목주차장~윗세오름 >
최근 며칠 동안 한라산에는 눈이 내렸다. 제주 시내에서 바라본 한라산은 정상인 백록담은 물론 능선까지 눈으로 덮여 있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전 9시 30분경 숙소를 출발하여 어리목 주차장에는 오전 10시 10분경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았다. 일부는 어승생악을 향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어리목 주차장에서 사제비동산(1,423m, 새매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만세동산(1,608.1m, 만수동산 또는 망동산으로도 불림), 그리고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이었다.
주차장에서 사제비동산까지는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 동안 급경사를 올라가야 한다. 등산로가 숲길이어서 주변 경치를 별로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거나 쉬엄쉬엄 오르곤 한다. 하지만 사제비동산 이후부터 만세동산, 윗세오름까지는 마치 산책하듯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등산로 양옆으로 족은두레왓(작은 들판을 의미람, 높이 1,339.2m), 뒤쪽으로 어승생악(높이 1,176m) 등의 설경을 감상할 수 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눈이 점점 많아진다. 사제비동산에 도달하니, 주변은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등산로 양쪽에 희귀하게 서 있는 나무들에는 흰 눈이 쌓여 눈꽃을 이룬다. 넓은 평지의 조릿대 위에도 눈이 쌓여 그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였다.
전망대를 지나면 정면으로 한라산 정상의 북벽이 하얀 눈으로 치장한 모습이 드러난다.
좌측으로는 듬성듬성 눈이 쌓인 곳과 갈색으로 변한 조릿대가 어우러져 민대가리오름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
우측으로는 흰 눈이 덮인 나무들이 족은윗세오름의 정상을 장식한다. 때로는 흰 눈으로 덮인 나무들이 동굴을 형성하기도 하고, 긴 벽을 이루기도 한다.
만세동산의 넓은 평원은 흰 눈으로 덮여 있다. 좌측에는 민대가리오름이, 우측에는 족은윗세오름이 호위하듯 서 있다. 한라산 백록담은 흰 눈으로 덮인 투구와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윗세오름~남벽분기점 >
만세동산을 지나 윗세오름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영실에서 온 사람, 돈내코에서 온 등산객, 어리목에서 올라온 이들이 한 곳에 모이는 곳이다. 어떤 이들은 컵라면을 먹고, 또 다른 이들은 김밥을, 다른 이들은 빵과 커피, 과일 등을 먹으며 고단한 몸을 쉬고 있다. 대피소 안내방송에서는 오후 1시부터 남벽분기점 입산을 통제한다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12시 30분에 출발했다.
윗세오름에서 100m 정도 올라가니, 만세동산이나 사제비동산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등산로는 마치 눈 속의 정글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준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정글을 떠올리게 했다. 한편으론 나무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많이 쌓인 눈이 쏟아질까 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글 같은 길은 한두 곳이 아니었고, 그 형태도 다양했다. 걸으면서 마주하는 백록담의 경치가 더없이 멋있다. 뾰쪽하게 뛰어나온 바위 위에 쌓인 눈은 삼국시대 대장군의 투구를 연상시킨다.
탐방로를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감동적인 경치가 계속된다. 서귀포 방향으로는 한라산보다 낮게 흰 구름이 드넓게 퍼져 있다. 그 위로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더욱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한 시간가량 이러한 아름다운 풍경에 푹 젖어 있다.
남벽분기점에 가까워질수록 따뜻한 날씨로 인해 눈이 녹아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래서 남벽분기점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는 미처 보지 못한 곳까지 더욱 세심하게 주변 풍경을 감상한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오후가 되자 눈이 많이 녹아 만세동산, 사제비동산 등의 등산로가 질퍽질퍽 해졌다. 사제비동산부터는 눈이 가득 쌓인 나무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지 2~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풍경이 달라졌다는데 새삼 놀라웠다.
사제비동산부터 어리목주차장까지의 2.9km 등산로도 얼음이 대부분 녹아내렸다. 그늘진 곳만 흰 눈이 쌓여 있었고, 햇빛이 비치는 곳은 어김없이 녹아내렸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자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이 눈이 보이질 않는다.
< 어리목주차장~사제비동산 >
숙소에서 바라본 한라산은 어젯밤 내린 눈으로 중턱까지 하얗게 덮여 있었다. 설경이 멋있을 것 같아 바로 짐을 챙겨 한라산 영실코스로 향했다. 휴일엔 아침 7시까지 주차장에 도착해야 하지만, 평일이라 주차 공간을 걱정하지 않고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니 오전 9시 30분이었다.
평소 자주 가던 영실 코스로 가는 길을 지나치고 말았다. 어승생 삼거리에서 1100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올라가야 했는데, 산록서로를 따라 계속 직진해 버렸다. 그래서 계획을 바꿔 어리목으로 등반하기로 했다.
오전 9시 30분, 어리목 주차장은 한산했다. 월요일 오전이고,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고 한라산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등산객이 적었다.
등산화를 당겨 매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한 뒤 등반을 시작했다. 등산로는 매우 조용했다. 20~30분 올라가면 한두 사람 만날 정도였다. 어리목 주차장에서 1.1km 지점까지는 산책로가 얼어있고, 눈이 조금 쌓여 있어 평범한 산책로와 비슷했다.
등산로 입구를 지 1.1km 지점부터 사제비동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까지는 숨 막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겨울이라 활엽수의 잎이 모두 떨어진 상태에서 그 가지 위에 상고대가 가득 피어 있었다. 산을 더 올라갈수록 상고대는 더 진해졌다.
나뭇가지마다 새하얀 상고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듯했다. 마치 그것이 나뭇잎처럼 보였다. 산책로와 나무 기둥을 제외하고는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산책로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갈색 나무 기둥에 하얀 눈꽃이 뒤덮인 하얀 숲 터널이 된다.
< 사제비동산~윗세오름 >
사제비동산에서 출발해 만세동산을 지나 윗세오름까지 이어지는 탐방로 양옆으로는 조릿대가 가득하며, 주목과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다. 길 양옆의 나무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다. 상록수는 나뭇잎 위에 쌓인 눈으로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인다. 활엽수 가지에는 2~3cm 정도의 눈이 바람과 추위에 의해 얼어붙어 있다. 새하얀 평지에 눈으로 덮인 나무들이 돋보여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사제비동산에는 안개가 가득하여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책로에서 약 20~30m 정도까지는 시야가 확보되나, 그 이후로는 구름만 보인다.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까지 이어지는 넓은 평지는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올라갈 때는 구름이 가득해 마치 신선이 사는 동네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산길에는 윗세오름에서 만세동산까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되었다. 이런 날씨에 왼쪽으로는 족은윗세오름과 윗세누운오름이 흰 돛단배를 닮은 모습으로, 우측으로는 민대가리오름 주변에 눈이 내려앉은 주목이 위용을 자랑하며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 윗세오름~남벽분기점 >
윗세오름에 도달하자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백록담을 둘러싼 북벽이 드러나고, 눈이 소복이 쌓인 윗세누운오름을 비롯한 주변 풍경이 맑게 보인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이어지는 등산로는 겨울철 한라산의 진수를 보여준다.
길을 따라 주목군락이 군데군데 있어, 흰 눈으로 덮인 숲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백록담의 북벽에서 서벽, 남벽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의 경치를 둘러볼 수 있으며, 조릿대로 가득 찬 윗세오름, 주목이 우거진 방애오름 등의 다채로운 풍경도 만끽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서귀포 시내 전경까지 내려다보인다. 이 코스는 제주도의 독특한 매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숲 속 눈꽃 터널은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눈으로 덮인 숲을 관통하는 4~5개의 터널은 마법 같은 분위기를 선사하며, 터널 사이로 엿보이는 백록담의 경치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 윗세오름~영실 선작지왓 >
겨울철 영실코스의 설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남벽 분기점을 방문한 후 선작지왓 방향으로 향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선작지왓까지는 평지로, 대피소에서 노루샘까지는 겨울철 한라산의 매력이 느껴진다. 등산로 왼쪽에는 1,740.5m 높이의 윗세오름이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백록담의 북벽이 자리 잡고 있다. 오름 능선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에 흰 눈이 쌓여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한다. 등산로 오른쪽에는 흰 눈이 쌓인 윗세누운오름이 있어, 마치 둥근 큰 언덕을 연상케 한다.
노루샘부터 선작지왓까지는 오른쪽에 누운윗세오름과 족은윗세오름 능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왼쪽은 조릿대가 가득한 눈 덮인 평지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흰 구름이 마치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선작지왓에서 병풍바위까지는 등산로 양쪽으로 2~3m 높이의 주목 등 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이 나무 가지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마치 눈 세상을 연출한다.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까지의 등산로에 비해 다소 못 미치지만, 한라산의 겨울을 느끼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병풍바위 아래로는 흰 구름이 가득하고, 그 아래로는 등산로와 영실 계곡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윗세오름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백록담의 북벽은 이제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