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대륙, 14번째 나라, 2번째 도시
영국은 나에게 <해리 포터>의 나라이고, 영국의 수도인 런던은 해리 포터의 도시이다.
런던에 오기 전부터 내가 가장 기대했던 건 런던아이나 템스강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영국 국회의사당이나 빅벤 같은 멋진 건물 대신 빨간색 이층 버스와 빨간색 공중전화기 부스 같은 해리포터 영화에서 봤던 영화 속 런던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세람 집에서 런던 시내로 가기 위한 버스가 빨간색 2층 버스이고 이 큰 버스가 아기자기한 낮은 상가들 옆을 쓱쓱 지나갈 때 2층에 앉아서 그곳이 영화 촬영지 일리가 없는 걸 알면서도 영화 속 분위기와 너무 닮은 풍경을 바라보며 마치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인데 이미 행복할 수 있다니!!
4박 5일의 짧은 런던 일정에 워너브로스까지 가는 건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의 기념품 샵으로 향했다.
남편이 해리 포터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아서 일정을 무리하게 잡지 않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유니버설을 가도 해리포터 어트랙션이 있다는 사실에 미련 없이 가까운 곳에서 해리 포터를 누리기로 했다.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은 영화 속에서 머글(마법을 못하는 일반인)이 아닌 마법사들이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플랫폼 사이의 기둥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곳인데 실제 런던의 킹스크로스역 한편에 짐을 들고 통과하던 플랫폼 입구를 재현해 놓고 호그와트 학교 기숙사의 목도리와 마법 지팡이를 빌려주는 포토존을 만들어놨다.
워낙에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있다 보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나도 그 줄에 합류했다. 일행과 얘기하는 틈을 노려 새치기하는 외국인이 있어서 줄 서있는 거니 뒤로 가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며 지켜낸 내 순서가 됐을 때 너무 신이 나서 인증샷을 찍었다.
근데 나만 신난 거라 남편은 사진을 찍지 않고 대신 내 사진을 열심히 찍어줬다.
사진을 찍은 후의 동선이 자연스럽게 기념품 샵으로 이어져서 기념품 샵에 들어가서 부엉이 인형, 도비 인형, 각 캐릭터가 썼던 마법 지팡이를 포함한 여러 기념품을 구경했다.
마법 지팡이는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흥미가 떨어지면 분명 예쁜 쓰레기가 될 걸 알기에 지팡이를 한번 흔들어보는 걸로 기분만 냈다.
나도 해리 포터의 한 장면처럼 빨간색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서 마법부로 들어가는 흉내라도 내보려 했는데 공중전화를 잘 쓰지 않는 지금 전화박스는 노상방뇨를 하기 좋은 장소가 되어주는지 그 안에 지린내가 너무 심해서 그 앞에서 사진 한 장 찍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해리 포터를 알기 전의 나에게 런던은 셜록 홈즈의 도시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아서 코난 도일 작가의 셜록 홈즈 책을 시리즈별로 읽으면서 상상하곤 했는데 원래의 소설은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 배경이라 책을 읽으며 런던의 모습을 그려보면서도 현재의 런던과 매칭이 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베네딕트 컴버배치 배우가 주연인 영국 드라마 <셜록>이 셜록홈즈의 사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템스강 옆 런던의 풍경을 보여줘서 런던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었다. 뉴욕의 노란색 택시만큼이나 유명한 런던의 검은색 택시가 내 옆을 지나갈 땐 내가 셜록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셜록 홈즈 책이나 셜록 드라마나 변함이 없었던 점은 바로 셜록 홈즈의 집, 베이커가(Baker Street) 221B여서 나랑 남편도 시간을 들여 그 앞에 가보기로 했다.
실존하지 않는 존재임에도 책 속에서 셜록 홈즈를 죽였다가 팬들에게 엄청난 불평과 비난의 편지를 받은 후 다시 부활하는 시리즈까지 쓸 만큼 굉장히 인기가 있는 캐릭터다 보니 베이커가 지하철역부터 이미 셜록 홈즈의 검은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고 역에서 나오면 동상도 볼 수 있다.
베이커가 221B에는 셜록 박물관도 있는데 끝날 때쯤 도착해서 입장이 불가인 데다가 하필 그날이 런던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아직 불 켜진 실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런던은 남편이 좋아하는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도시이기도 하다. 템스 강변에 영화상에서 제임스 본드가 일하는 첩보기관으로 유명한 해외 정보국(MI6)의 본부가 있어 세람네 집에서 시내를 오가는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오늘은 본드가 본사에서 근무하는 날인가?", "본드는 해외에서 활약을 하니 정작 런던에서는 보기가 힘들지"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유럽 여행의 마지막 도시라서 어쩌면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런던 여행이었는데 내가 좋아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영국을 대표하는 여러 가상의 캐릭터들이 영화, 드라마, 책 속에서 실제로 돌아다녔던 공간을 직접 돌아다니거나 눈으로 볼 수 있어서 특별하고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