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명절은 즐겁지 않았다

가정폭력 생존기 12.

by 소년의 초상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명절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친척이 없으니 갈 곳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에게 명절은 기대되는 날이 아니었다. 그저 많이 쉬는 날일 뿐이었다.




친할아버지는 황해도에서 나고 자라셨다. 즉, 이북분이셨다. 6.25 전쟁으로 인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착해 사신 것이다. 친척이 하나도 없으니 친할아버지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매일 술로 사셨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뵌 적도 없다. 엄마를 통해 이야기만 전해 들은 것이 다였다.


게다가 친할머니도 일찍이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나긴 했지만 돌쟁이였을 때라서 이 또한 전혀 기억이 없다. 그렇게 우리 친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엄마는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차라리 조부모님들이 없는 편이 나았다고. 얼마나 형편없었던 것일까?


평소에는 그럭저럭 살았다. 조부모님이 있거나 말거나, 친척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꼭 명절시즌이 되면 뭔가 마음이 허전했다. 나에게만 조부모님이 없는 것 같아서 공허하고 쓸쓸했다.


우리 가족은 명절 당일에 친할머니의 남동생, 즉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그런데 갈 때마다 느낀 부분이지만, 별로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거기 사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분명 나와 피가 섞였을 텐데 왜 그렇게 차갑지? 어른이 된 지금은 아예 왕래도 없다.


명절 당일 오전에 산소에 갔다가 작은할아버지 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끌벅적,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사촌형과 함께 지금은 없어진 철길로 갔다. 당시 철길은 안전불감증으로 누구나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뚫려 있었다.


사촌형과 나는 조약돌을 주어서 철길 위에 올려놓고는 기차가 오길 기다렸지만, 한 번도 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차라리 잘됐다. 그 조약돌이 쪼개질 때 옆에 있었으면 많이 다쳤을 것 같다. 사촌형과 조금 놀다 보면 오후 1시나 2시밖에 안 됐다. 그럼에도 우린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게 명절의 끝이었다.


아빠는 집에 와서 술을 마시거나, 혼자 밖에 나가곤 했다. 엄마와 나, 누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셋은 사람이 북적이는 시내로 나갔다.


시내는 명절이라 그런지 항상 한산했다. 명절 전 날이나, 명절 다음 날에는 사람이 꽤 많지만 당일에는 항상 사람이 없었다. 우리 셋은 잘 알고 있다. 항상 그렇게 다녔으니까.




우리 셋은 항상 영화부터 예매했다. 그때 봤던 영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가문의 영광 1편'. 정말 재밌었다. 지금 다시 봐도 즐겁다. 예전 한국영화 감성이 좋다. 뻔한 스토리여도 감정선이 녹아들어 있다.


아무튼, 우리 셋은 가문의 영광을 아주 재밌게 보고 시내 구경을 했다. 엄마는 없는 형편이지만 명절에는 꼭 무언가 하나라도 사주려고 했던 것 같다. 누나와 나는 엄마가 뻔히 돈이 없는 걸 알면서도 치기 어린 마음에 옷가게에 들어가서 이거 사줘, 저거 사줘, 하면서 투정도 부렸던 것 같다. 엄마는 굳이 화를 내지 않으셨다. 돈이 허락하는 선에서 되도록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우리에게 되게 미안했던 것 같다. 명절인데, 갈 데도 없고, 아빠라는 사람은 혼자 나가버리고, 용돈도 못 받고, 그런 모습이 불쌍했을 것이다. 외가는 친척이 많았지만 아빠 때문에 만나지도 못하니,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당시 엄마는 30대였을 텐데, 어찌 그 많은 것을 감당했을까. 정말 헌신적이었다.


그렇게 옷을 한 벌 정도 사고, 시내를 쭉 돌아다니다가 캔모아에도 가봤다. 우리 셋은 어색하게 앉아서 과일주스도 마시고, 팥빙수도 먹곤 했다. 엄마는 돈도 얼마 없었을 텐데 어찌 그렇게 살뜰히 잘 챙겨주었을까. 그때의 엄마가 불쌍하다. 그때의 엄마를 안아주고 싶다.


해 질 녘이 되면 우리 셋은 서로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제일 컸을 것이다. 아빠는 명절에 거의 취해 있었다. 이 때문에 작은할아버지 댁도 탐탁지 않아 했을 것이다. 명절인데도, 우리는 아빠의 술주정을 받으러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늘 그런 일이 반복됐다.


시한부 희망, 뻔한 스토리, 체념 등 이런 어둑한 말들이 어울리는 시절이었다.




나도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이젠 아이들을 위해 명절을 열심히 보낸다. 해외에 나갈 돈은 없지만 국내에서 열심히 돌아다닌다. 친척들도 자주 만나서 스킨십 하게 해 준다. 맛있는 음식을 해먹기도 하고, 외식을 거하게 하기도 한다.


주변 친척들이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용돈도 많이 주고, 선물도 사준다. 비록 되돌려 줘야 하는 '품앗이'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사랑받으며 명절을 기대하는 모습이 행복할 뿐이다. 나는 그거면 됐다. 조잘 조잘대며, 어떤 장난감을 살지, 어디를 갈지,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에겐 위안이된다.


'어린 시절 갖지 못한 것을 내 자식에겐 줄 수 있다는 것.'


이제 나에게 명절이란 슬픔도, 아픔도, 두려움도, 불면증도 없다. 온전히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따뜻한 명절이다. 이제는 명절이 길면 좋다. 안 심심하다. 명절에 무얼 하고 지낼지 기대가 된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한복을 꺼내놓고 내복만 입은 채 패션쇼를 한다. 그래, 너희는 그렇게 즐겨라. 아무 세상 걱정 없이 즐겨라. 걱정을 몰라야 할 때는 걱정을 하지 말아라. 그게 어린이의 몫이다. 아빠는 너희 세상을 지켜주련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가 있는 본가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만 남아 있어서 그런 마음이 덜 하지만, 누나네 가족과 우리 가족 등 모두가 모여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낯설다.


뿌듯하지만 낯설다. 엄마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엄마와 누나, 나, 이렇게 셋이서만 이제는 쇠락해만 가는 시내로 나가서 영화도 보고, 쇼핑을 해보고 싶다. 지금은 캔모아가 없어져서 스타벅스를 가야 하겠지만.


명절만 되면 가문의 영광이 생각난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과 재력 모두 넉넉해진 자식들이 엄마를 위해 시내 투어를 해주고 싶지만 자꾸 미루게 된다. 귀찮기도 하지만 괜히 예전의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은 것이 크다. 예전 힘들던 시절을 굳이 꺼내고 싶지 않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셋이 명절에 시내를 나가는 순간 그 기억들이 모두 공유될 것이다.


이번 명절에도 고민이다. 언제쯤 멋지게 말할 날이 올까? "엄마! 우리 그때처럼 가문의 영광 같은 영화 보러 갈까?"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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