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 18.
잔은 이미 비어 있지 않다.
마실 만큼만 남아 있고
그대로 둬도 되는 상태다.
그런데 잔이 다시 채워진다.
묻지 않는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거절은 타이밍을 놓친다.
“한 잔 더 해.”
이 말은 부탁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방향을 정해둔 통보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괜찮다고 말하면
이유를 묻는다.
이유를 말하면
설명을 요구한다.
설명까지 끝내면
이미 분위기는 어긋나 있다.
술은 핑계가 된다.
친해지자는 말,
정 없다는 말,
오늘만이라는 말.
다 비슷한 얼굴을 하고 나온다.
마시는 쪽은
조금씩 흐려지고
권하는 쪽은
점점 확신에 찬다.
같은 자리에 있는데
속도는 다르다.
잔을 비우지 않으면
대화가 멈춘다.
다시 채우면
대화가 이어진다.
그 사이에
선택은 사라진다.
나는 천천히 마신다.
비우지 않는다.
잔이 남아 있으면
다음 잔이 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배웠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같이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일 때가 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같이는 사라지고
술만 남는다.
그 사람은 오늘도
분위기를 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는 집에 가서
물을 많이 마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