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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Dec 25. 2023

2021년 크리스마스(feat. 유방암)

3일간의 기록

그날도 눈이 왔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며칠 동안 내린 눈과 또다시 날리는 눈이 뒤섞여 바깥은 하얀 풍경을 보여주었다. 요양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세상이 너무나 처량하고 서글퍼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미리 일기예보 찾아가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그때는 한 번도 오지 않던 눈이 요양병원에 와있으니 이쁘게도 내린다. 세상은 하얗게 예쁜데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까맣게 문드러져서 애처로웠다.

'왜 눈까지 내리고 지랄이야. 젠장' 되뇌며 욕하다 울다를 반복했다.


재작년 11월에 난 유방암 환자가 되었다.
(드디어 암밍아웃!!! 그냥 큰 글씨로 써보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이 글을 연재해 보려고 목차만 수없이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시작도 못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덤덤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걸로 봐서는 아직 쓸 자신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 지금 엄청 잘 살고 있으니 혹시라도 힘든 사람이 있다면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여전히 놓지 못하고 고민하는 중이다.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뭐 자랑거리도 아니니까 굳이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구구절절한 신파가 되어 위로와 동정을 구하는 글처럼 비치는 것은 더더욱 싫고 그렇다고 또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쓰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 부담이 된다.

결론은 아직 감정을 절제해 잘 쓸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에 이렇게 밝히는 것도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MBTI로 치면 대문자 E였는데 진단 이후 I 쪽으로 슬슬 기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시간이 흘러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암시키 물렀거라!', '암뽀개기', '니까짓 게 설쳐봐야 별 수없어.' 뭐 이런 식으로 조금은 유쾌하게 치료일기를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면서 마음도 같이 자라나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수술하고 첫 항암을 하고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요양병원을 선택했다. 그 당시 딸이 고3, 아들이 중3 올라가는 중요한 시기여서 더더욱 그런 결정을 한 것 같다.(다시 생각해 보니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는 매일이다. 단 하루도 중요하지 않은 날은 없다.) 그런데 하필 크리스마스가 끼어있었다. 게다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병원에서 머릿속으로 혼자 소설을 쓰면서 이 크리스마스를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 억울해서 울었고 내가 안쓰럽고 애처로워 또 울었다. 아마 내가 흘린 눈물과 나의 차가운 마음이 만나 꽁꽁 얼어붙어 눈이 되어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만들었나 보다. 오늘도 눈이 온다. 오늘은 거실 커다란 창문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그날이 생각나서 그때 썼던 일기를 꺼내 요약해서 옮겨보려 한다. 참고로 몇 번의 크리스마스를 더 볼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내 소설은 폐기처분했다. 한 50년쯤 크리스마스를 더 볼 계획을 잡고 열심히 살고 있다.




2021.12.23

항암 3일 차. 잠은 왜 이리 일찍 깨는 건지... 잠깐이라도 숙면을 취하면 좋으련만 그도 못하면서 게다가 새벽에 몇 번씩 잠을 깨기까지 한다. 속이 쓰린 건지 니글거리는 건지 불편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누워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어둔 토마토 반 개를 먹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속이 비어있으면 더 울렁거림이 심한 것 같아서 억지로 채워 넣었다. 혹시나 해서 식사시간에 나온 토마토를 킵해둔 건 잘한 일이었다. 아이 둘을 낳으면서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입덧을 지금 하는 것처럼 울렁거린다. 몸이고 마음이고 지금 겪는 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느끼는 최고이자 최악의 고통이다. 그러면서 간절히 바라는 건 지금까지 최악이 아닌 내 모든 생에 있어 최악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쁜 일은 안 일어나길 간절하게 바라본다.

아침식사가 나왔다. 여전히 입맛은 없지만 죽은 다 먹었다. 지금 못 먹는 건 냉장고로 옮겨놓고 알뜰살뜰 살아간다. 어제보다 컨디션이 조금 나아짐에 감사하고 샤워도 했다. 그나마 컨디션이 좀 나을 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혹시나 또 아파질까 봐 불안하다. 요양병원 들어오고 처음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도수치료도 받고 저린 발을 위한 마사지도 받고 저녁에는 싱잉볼 명상도 다녀왔다. 씩씩해지려고 하고는 있는데 가끔 무너지려 하고 지치기도 한다. 이제 시작인데 이러면 안 된다. 막연한 파이팅을 또 외쳐본다.


요양병원에도 크리스마스는 오나 보다. 각자의 소원을 적어서 달아놨다. 절절한 그 소원들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2021.12.24

크리스마스이브. 항암 4일 차.

특별한 것 없는 365일 중 하루에 불과한 날이다. 자칫하면 슬퍼질 수 있으니 의미부여는 하지 말기로 하자.

진단받은 이후 모범생이 되어가는 것 같다. 제시간에 일어나 밥도 먹고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일정을 소화하며 정해진 시간에 약도 잘 챙겨 먹는다. 네일숍 다닐 때도 안 바르던 손톱강화제를 멋 내기도 아닌 치료제로 아침, 저녁 바르고 있다. 항암시 손발톱이 깨지거나 까매질 것을 대비하는 거란다. 마음 강화제는 어디 안 팔까. 마음이 더 까매지고 더 깨질 것 같은데 이건 예방약도 치료제도 없어 보인다. 온전히 내 의지로 매달려 붙잡아야 한다니 버겁기만 하다. 여전히 체력은 엉망이고 머리도 띵하다. 일상으로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아침부터 눈까지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다 눈처럼 눈물이 내렸다.

크리스마스이브 점심이라고 나름 특식이다. 파스타에 호두과자 등등.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씩씩하게 사랑하는 가족과 영상통화를 했다. 이놈의 눈물은 쓰면 쓸수록 더 만들어지는 것처럼 마를 생각이 없다. 그래도 얼굴 보니 좋았다. 이렇게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보자. 모두가 제자리에서 씩씩하게 잘해주니 고맙다. 나만 잘 버티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다. 힘을 내보자. 고마운 내 편들을 위해.


내 발은 루돌프. 비록 병원이지만 나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봤다.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이유하나로 따뜻함을 전해준 옆방 환우님들. 우리 모두 꼭 더 행복해지길 기도합니다.




2021.12.25

크리스마스. 남자친구가 온다. 이십 년을 같이 살고 이제 두 번째 연애를 하는 내 남자친구가 크리스마스에 서프라이즈를 해주겠다며 추운 길을 뜨겁게 달려오고 있다.

기다리는 여자친구는 설렌다. 이쁜 옷도 없고 엉망이지만 조금이라도 혈색 좋게 보이고 싶어 립밤도 바르고 시계만 바라보고 있다. 결혼 이십 주년을 지나 새로운 연애 1년 차 이 커플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인생두번살기~!!!

같은 남자와 두 번 연애하기!!!

진단 이후 다시 사는 기분으로 우리 부부는 더욱 견고해졌다. 영원히 지겹도록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사람이 어쩌면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정신이 번쩍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요양병원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커피 한잔을 놓고 차 안에서 데이트를 했다. 뒷좌석엔 우리들의 보물인 아이들이 앉아있었고 우리 가족 넷은 그렇게 차 안에서 커피 향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래도 울지 않고 제법 씩씩하게 그들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그만 좀 울자. 결국 지나간다. 크리스마스에 혼자가 아니어서 감사했다. 속도 조금은 편안해진 느낌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음은 그 어떠한 약보다 효과가 탁월하다.




다시 보니 또 울컥하지만 한결같은 맘으로 애써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잘 버텨준 나도 대견하다.

지속적인 관리와 추적관찰이 필요하고 어떤 날은 불안감이 몰려오기도 해서 암환자라는 굴레에서 온전히 벗어나긴 힘들지만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하루 예쁘게 살아보려 한다. 이렇게 몸을 아끼며 관리하는데 백 살까지는 거뜬하지 않을까 싶다.

그 당시 고3이었던 우리 딸은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갔다.(이건 좀 자랑하고 싶은 부분이다. 본인을 주인공으로 출연시켜 달라고 생떼 중이어서 일단 예고편으로 잠깐 출연시켜 준다.) 중3이었던 아들은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이건 자랑이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는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학교라 이렇게 표현했다. 고등학교 잘 다니고 있다는 뜻이다.)


눈 내리는 창밖을 보다 잠시 2021년에 다녀왔다.


Happ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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