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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Jan 27. 2024

건강하면 됐지 뭐.

예쁘기까지 할 필요가 있나

특수 임무 수행 중!!!


환자라는 특수 임무를 맡은 지도 2년이 지나가고 있다. 환자복은 벗었지만 아직 특수 임무 수행 중이다. 한동안 옷을 사지 않았다. 운동과 식이에 집중했고 그러다 보니 운동에 관련된 용품들만 사들이고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입을 예쁜 드레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머리통에는 어떤 옷도 어울리지 않았고 오랜 시간 거울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한때는 거울이 있는 공간을 걸을 때 일부러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어느 날은 거울을 깨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정상이라 다행이다. 거울을 깨도 머리카락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으니.

나의 지출비용 중 상당 부분이 어설픈 판공비와 나의 꾸밈비로 사용되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의류비나 치장에 쓰는 돈이 예전에 비하면 무지출에 가깝다. 옷장을 열어보고 2년 동안 버린 옷이 수도 없이 많다. 내 옷장을 차지하고 있는 옷들은 대부분 원피스와 샤랄라 한 여성스러운 옷들이었다. 어차피 어울리지 않아 입지도 못하고 이 몰골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지도 않을 것이니 모두 필요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무용지물이라 생각한 것들을 한가득 싸서 재활용 의류수거함에 버리고 온 날은 나의 심통도 같이 내다 버린 기분이 들어 잠시 잠깐 홀가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 해결책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주는 힘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긴 했는데 그게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머리카락이 잘리면 힘이 빠지는 삼손처럼 세상에 맞설 힘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모자를 종류별로 몇 개를 샀는지. 비니도 색깔별, 디자인별로 사들였다. 남들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인  아무 차이도 없는 것들 사이에서도 무척 고민했다.

어느 날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공원을 가려고 집을 나서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갑자기 강풍이 휙~ 모자를 벗겨버렸다. 횡단보도 한가운데로 모자가 날아가 앉아 있고 신호등은 빨간 불이다. 건너가 잽싸게 주워서 다시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창피해서 울었고 서러워서 울었다. 모자와 난 서로를 바라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울고 있었다. 그 이후로 모자는 꼭 끈이 달린 것으로 쓰고 다녔다. 목에 끈을 꼭 조여서 쓴다. 모자가 날아가 반짝이는 머리가 보이는 것보단 목이 졸리는 게 나았다.

또 한 번은 항암 중에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대상포진까지 와버렸다. 참으로 버라이어티 했다.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서 통증의학과를 찾아갔다. 약만 받아 올 생각에 갔는데 어깨에 주사를 맞으란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맞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주사실에 들어가 엎드리라는데 모자를 벗으란다. 그때만 해도 특수임무 초기단계라 모든 것이 분하고 낯설어서 암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샘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모자 벗고 엎드려서 주사 맞는 내내 엉엉 울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 맘을 조금이라도 이해했을까? 아니면 '이 빡빡머리 여자는 뭐지? 대상포진이 이렇게 슬플 일인가?'라고 생각했을까? 주사를 다 맞고 주차장에 내려와 운전석에 앉았는데 그렇게 울고도 눈물이 남았는지  한참을  더 울어댔다. 그때는 그랬다. 커다란 물풍선이 내 앞에 빠싹 붙어 있고 뾰족한 칼날들이 내 몸에 돋아있어 조금만 흔들려도 곧 터져버릴 준비를 늘 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주 작은 말들과 상황에도 폭발음을 내며 '펑!' 하고 터져서 홍수가 나는 뭐 그런 아노미상태였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글로 쓸 수 있을 만큼 조금은 덤덤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게다가 머리카락은 다시 열심히 자라나고 있다. 처음에 민머리에서 샤프심처럼 뾰족뾰족 올라오는 머리카락에 감사했고 신기했다. 머리카락 빨리 자라게 하는 약을 찾아보기도 했고, 어서 비니랑 모자를 벗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수개월이 지나자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해야 머리를 말릴 수 있는 상태까지 되었다. '자기야! 나 드라이한다!' 웃픈 자랑도 했다. 약간의 커트머리 비슷한 상태가 되었을 때는 모자를 벗고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며 외출도 했다. 난 항상 긴 웨이브 머리였기 때문에 짧은 커트가 군입대하는 청년의 갓 자른 머리처럼 어색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어' 

주변이 신경 쓰일 때마다 속으로 되뇌던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아무도 크게 나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 나인줄 착각하니까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아 혼자 어색할 뿐이다.

이제는 머리핀과 끈을 사야 할 정도로 자라났다. 비록 아직 돼지꼬랑지처럼 묶이는 정도지만 그래도 묶일 만큼 자라난 머리카락이 고마웠다. 머리카락 자르는 게 너무 아까워 그냥 마냥 기르다 보니 지저분하게 자라나고 있다. 그래도 자르지 않는다. 어떻게 기른 건데. 머리카락이 길어지면 그 머리카락으로 밧줄을 내려 세상밖으로 탈출하려는 라푼젤처럼 자를 생각이 없다.




사람 마음은 정말 어디까지 간사할 것인가.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나면서 관심 없어졌던 옷을 사고 싶어졌다. 건강한 여자 사람 말고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졌다.

트레이닝복 말고 예쁜 옷이 입고 싶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몸매다. 몸통인가? 아무튼 살이 쪄서 사이즈를 업해야 하는 상황이다. 살 빼고 사야지 생각했는데 영원히 못 살지도 모르겠다는 현실 자각을 하고 그냥 이대로 맞는 옷을 사야겠다 생각했다. 유리벽 안의 날씬한 마네킹들이 입은 옷들이 예뻐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피팅룸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예전 사이즈는 감히 맞지도 않아 한 사이즈를 올려서 입었는데도 아주  꼭! 맞는다. 딱! 어울리는 느낌이 아니라 꼭! 맞는 느낌이다. 다시 들어가 벗고 나와 '둘러보고 올게요'라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매장을 나와버렸다. 역시 옷은 작은 게 이쁘다. 그런데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니 이쁘지 않다. 삼단논법이 이렇게 귀결되는구나

결국 옷은 사지 못하고 심통이 나서 돌아왔다. 변명을 하나 하자면 내가 먹는 약은 여성호르몬 분비를 차단하는 약이다. 에스트로겐 분비를 막음으로써 재발을 막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약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강제적으로 갱년기 증상이 나타난다. 보통은 갱년기 증상을 막겠다며 여성호르몬이 많이 들어간 영양제를 먹거나 호르몬 주사도 맞지만 나에게는 금기다. 그러다 보니 갱년기 증상을 몸전체로 그냥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체중 증가, 복부비만이다. 물론 많이 먹는 것도 아니까 약의 잘못만은 아니다. 다만 먹는 양과 운동양에 비해 좀 억울하게 찌는 면이 있다는 얘기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또 하나 의아한 것은 여성호르몬을 차단하는데 왜 아직도 맘은 말랑하고 눈물은 안 마르는 걸까? 어떠한 일에도 의연하고 씩씩해지고 싶은데. 예전보다 더 여성스러워진 느낌이다. 맞나? 주변에서도 동의해 주려나.

아무튼 그래서 난 머리카락은 자라났지만 뚱뚱한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통통쯤으로 할까?  아무튼 날씬하지는 않은 상태다. 그래서 옷가게 가면 심통 나고 예전 옷을 입어보다 짜증이 난다. 

그러다 또 갑자기 정신을 차리면서 '건강하면 됐지 뭐'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래. 그거면 됐지 뭐. 건강하면 된 거야. 언제는 살려만 달라더니 이제는 예쁘고 날씬하게 해 달라는 거야?

야야! 정신 차려. 욕심이야 그거. 건강만 주어진다면 세상 모든 것도 다 포기할 것처럼 하더니 그렇게 얄팍한 술수 섞인 기도였어?' 

자성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려왔다. 마음이 건강해서 참 다행이다.

그래. 난 이제 특수임무 2년을 지나는 중이지만 곧 임무완수하고 건강하고 멋지게 살면 된다. 

좀 덜 예쁘면 어떠고 살집 좀 있으면 어떤가? 

(물론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하면 더 좋겠지만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이렇게 합리화하는 중이다)

오늘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고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음에 감사하면서 내일의 빛날 나를 응원한다. 옷은 못 사고 돌아왔지만 글 쓰며 더 큰 것을 산 느낌이다.


'그래 괜찮다. 난 여전히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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