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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Mar 21. 2024

암친소

암으로 만난 친구를 소개합니다

유방암 카페에 가입했다.



진단 이후 경황없는 와중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커뮤니티 가입이다. 정확한 암의 타입 및 처방이 나오기 전까지 궁금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답답한 마음에 찾아 들어갔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다른 이들과 무언가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고  늘 새로운  곳을 찾아 합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아무리 그런 사람이지만 암카페까지 가입하게 될 줄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카페에는 같은 아픔을 가진 수많은 동지들이 있었다.(환우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 동지로 명명한다.) 사연도 가지가지, 구구절절 눈물 나는 안타까운 이들도 많이 보였다. 이렇게 유방암 환자가 많다니. 유방암카페니까 당연한 것이었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면서도 그 카페를 헤집고 다니며 온갖 정보들을 수집하기를 밤낮없이 했다. 이래서 환자나 보호자로 오래 생활하면 반의사가 된다는 말이 나오나 보다.

이론으로는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 모르는 건 질문하기도 하고 검색해서 찾아보기도 하면서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고 노력했다. 가끔은 찾아본 결과를 보고 불안감이 증폭되어 하루종일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랑은 카페가입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한 정보수집 이외에 감성적인 글들을 보고 우울감에 빠질까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으면 "뭐 봐?" 하면서 옆으로 쓱 와서는 폰 화면 한번 쳐다보고는 "그만 봐. 뭘 하루종일 그것만 보고 있어"하며 그 공간에서 나오길 바랐다.

아마도 암환자라는 틀에 갇혀 우울까지 끌어오면 어쩌나 하는 우려에서 나온 잔소리였을 것이다.

 카페도 보지 말라했는데 아예 지역사람들이 모인 단톡방에 들어갔다. 카페가 일방향이라면 단톡방은 쌍방향이니 조금 더 적극적인 참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같은 지역, 비슷한 또래, 같은 병원 사람들이 모여있는 오픈채팅방에 닉네임을 설정하고 들어가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닉네임 옆에는 나이와  다니는 병원이나 먹는 약, 또는 치료 중인 상황 등을 표시한다.

어디에서도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서 숨어 지내다가 동지들이 모인 곳에서 용기 내어 모든 것을 밝히고 일상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카페처럼 인원이 많지 않으니 모두가 친근했고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이유로 금세 언니, 동생이 되었다.

"그거 안 했으면 좋겠어." 신랑의 태클이 또 들어왔다. 아픈 사람들과의 모임이 충분히 불안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하는 마음도 알겠고 좋은 의도인 것도 알겠는데 거절했다.

"나 이 채팅방에서만 웃을 수 있어. 난 그럼 어디서 누구랑 얘기해?" 설움이 북받쳐 울먹이며 따지듯 얘기했다. 신랑도 더 이상 막지 않았다.

진단 이후 카톡 프로필도 바꾸고 모든 히스토리 사진을 삭제하고 친구들도 숨겨놓았다. 동지가 아닌 그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암에 걸렸는데 다른 이들의 즐거운 프로필 사진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할 뿐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 나에게 하루종일 수다를 떨고, 무서우면 무섭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얘기하면서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소통창구가 생긴 것이다. 그 방이 우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신랑도 카톡을 하면서 깔깔대는 나를 보고 안심했을 만큼 의외로 우리들의 방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조금씩은 병기도 다르고 치료방법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도하고 응원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치료를 하는 동안 그 방이 없었으면 버티기 힘들었겠다 싶을 만큼 동지들이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첫 모임


온라인에서는 아주 가까워진 우리들은 오프라인 모임을 하기로 했다. 몇 명이나 나올까. 진단 이후 공식적인 모임은 처음 나가본다. 치료가 끝나서 추적관찰 중인 사람들부터 나처럼 항암 중인 사람, 방사선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포지션의 사람들이 20명 넘게 모였다. 사람이 많으면 스승도 있고 재주꾼도  꼭 있는 법이라 했던가. 그중 이쁜 동생이 이름표를 만들어와서 나눠주었고 우리는 야유회 나온 사람들처럼 목에 이름표를 걸었다.  아래서 점심을 먹은 후 근처 공원에 둘러앉았다. 그날 주변사람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젊은 여자들이 목에 목걸이를 하고 20명 넘게 돌아다니니 어느 교회에서 나왔나, 혹은 보험회사에서 나왔나 싶어 무슨 단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전부 암인 걸 알면 깜짝 놀라겠지?" "하하, 그러게 말이야"

"암도 이쁜 여자 좋아하나 봐" "봐봐! 다 이쁘잖아"

"우리가 가슴이 없지, 가오가 없냐?" 우리들의 농담은 이런 것들이었다. 정말 놀랄 일이지만 이걸 농담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즐거웠다. 이런 말을 어디서 하겠는가. 우리만의 사는 방법을 익혀가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둘러앉은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우리 중 누군가가 주문을 받는다. 커피는 머리카락 있는 사람이 사 오기로 한다. "머리카락 있는 사람이 사와~. 머리카락 없는 사람은 앉아있어" 

우리의 위아래는 나이순이 아니었다. 치료가 먼저 끝난 사람이 치료 중인 사람의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난 그때 절찬리 항암 중이라 수발을 받는 입장이었다.

원래 선한 사람들인 것인지 암이 온 이후 착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러운 이들이었다.  난 원래 선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뭐 그다지 착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번 살아보려고 노력 중이긴 한다.


그중에 유독 77년생이 많았다. 77년생이 7명이나 되었고 우리는 우리들만의 모임을 만들자 했다. 한 해가 지나면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2명이 탈퇴를 하고 이제 다섯 명이 남았다. 이왕 하는 거 이름도 지어보자 했다. 일차원적이긴 했지만 이보다 명확한 표현도 없다. '우린 뱀띠니까. 게다가 이쁘니까. 꽃뱀클럽! 이게 딱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일 이런 과정을 거쳐 이름이 탄생되었다. 진단 이후 2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한 나의 동지, 꽃뱀클럽을 소개한다. 다섯 명 모두 너무나 다른 모양의 성격이지만 부딪히고 찔려서 상처 나는 일 없이 둥글게 잘 지내는 걸 보면 아무도 뾰족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꽃뱀클럽 멤버소개


1호는 자그마한 키와는 반대로 커다란 긍정의 힘을 가진 친구다. 예전에 나처럼 술을 좋아했다고 얘기하는 이 친구는 가끔 엉뚱한 소리로 친구들을 웃겨주기도 하고 매사에 의욕적이다. 카톡보다는 직접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를 선호한다. 가끔 1호는 운동에 미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운동에 진심이다. 최근에 바디프로필을 찍어서 쑥스러운 듯 우리에게 보여주는 1호가 자랑스러웠다.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했을지, 또 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가 1호의 잔근육에 새겨져 있었다.

늘 애쓰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부지런한 친구다. 성격이 급하고 우유부단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나와 닮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쿵'하면 '짝'을 해주는 친구다. 먹는 것은 또 얼마나 복스럽게 잘 먹는지. 이쁘다. 아침마다 꽃뱀 단톡방에 기분 좋은 아침인사를 건네주는 한결같은 1호가 고맙다.


2호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닌 마음이 아주 여린 친구다. 엉뚱 발랄할 때도 있고  무알콜 맥주 마시고도 알코올에 취한 사람처럼 흥을 올려 분위기를 띄워준다. 이토록 밝은 2호는 가끔 동굴 속에 들어가 친구들 걱정을 한 아름 안겨주기도 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우리를 응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 동굴 문은 이제 폐쇄된 것 같아 너무나 다행이다.  치마 입은 모습이 여성스럽게 예쁘고 화훼를 배우며 꽃같이 예쁜 마음을 더 피우기도 하고  요리 못한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맛있는 무쌈을 만들어주는 2호. 우리 둘째 아이와 2호의 아이가 같은 나이여서 가끔 속 터지는 교육얘기 공감지수가 높은 친구다. 밝은 에너지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2호를 항상 응원한다.


3호는 처음 만나서 질문했던 것이 생각난다. "넌 항암 안 했어?"나보다 먼저 치료를 끝낸 친구라 내가 항암 하면서 만났을 당시 너무나 풍성하고 굵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서 항암을 안 한 친구로 알았다. 항암을 했다는 말에 나도 3호처럼 다시 머리카락이 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친구다.  3호는 세심하고 섬세하다. 배려심이 지나쳐서 가끔 나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마음씀이 여리고 순하다. "처음엔 네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좀 편해졌어."라고 말하면서 속엣말을 해주는 친구의 고백이 달달했다. 나 어려운 여자 아니야. 정성스럽게 만든 예쁜 비누만큼이나 좋은 사람냄새가 나는 3호. 지금은 본인의 적성을 살려 건강한 모습으로 취업해서 워킹맘의 역할까지 너무나 멋지게 해내고 있다.


4호를 마지막에 쓰는 이유는 가장 진중하게 마음을 쓰고 싶어서다.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 소홀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 번도 4호에게 이렇게 진지하게 말해본 적은 없다. 쑥스럽기도 하고 서로 옛 일을 꺼내서 얘기하는 것이 힘듦을 상기하는 것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한다. 4호는 몇 번의 시험관 시술힘들게  늦은 나이에 임신했다. 그러나 임신 중에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된다. 임신 중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지만 아이가 나올 때까지 치료를 미루고 기다렸다. 너무나 기특한 그 아이는 엄마 치료 빨리 받으라는 듯 일찍 세상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생각해 보지만 감히 상상 밖의 영역이다. 그런 4호가 치료를 마치고 멋진 아들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그 귀한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엄마 최고!'라고 말해준다며 얘기하는 4호가 행복해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 챙이 넓은 모자에 흰 장갑을 끼고 나왔던 4호. '공주님이 나타나셨구나' 생각했다. 항암 때문에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고 아파서 장갑을 껴야 한다는 이야기에 잠시나마 가졌던 내 마음이 미안해졌다.  그 어느 누구의 고통이 작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이와 함께 잘 버텨준 4호가 너무나 대견하고 고맙다. 4호 덕분에 우리들은 천하보다 귀한 그 아이의 이모가 되었다. 4호의 멋진 아들과 내 딸의 나이차가 무려 스무 살 가까이  나니 4호가 더 대견하고 꼭 응원해주고 싶다. 가장 힘들었을 친구지만 누구보다 행복할 친구다.




인생이 뒤집어졌다고 생각한 그날 이후로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 누구에게도 편하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공감해 주며 함께 울고 웃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건 아니지만 지구보다 귀한 우리 서로를 지키는 독수리  형제 같은 그런 친구들이다.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던 그때 반대편에서는 무언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나 보다. 처음엔 그저 정보수집 차원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가까워진 사이가 되고  어느새 깊이 스며들어 보고 싶은 친구로 변해있었다.

비겁하게도 친구들과 가까워짐이 두려웠던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도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걱정거리가 늘어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였다.  비겁함과 이기심은 버리기로 했다. 까짓 거 다섯이 같이 짊어 메고 가보자!

꽃뱀클럽 친구들과 매달 모임을 갖고 송년회, 신년회를 하면서 나중에 팔순잔치를 같이하자 얘기했다. 현실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저 건강하게 오래 살자는 다짐의 표현이다.

우리의 이야기주제는 무궁무진했다. 한때는 늘 항암, 방사선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는데 이제는 보톡스, 필러, 심지어 노후대책까지 이야기하면서 두려움보다는 현재를 살며 미래를 준비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멀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헤매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이제는 예뻐지고 다시 사랑받는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몸도 마음도 다시 피어나고 있나 보다.

다시 피어나는데 큰 거름이 된 나의 친구들. 암 때문에 만났지만 그 덕분에 내가 성장했다.


고맙다!


(친구들의 사전동의를 구하고 작성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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