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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Mar 25. 2024

항암 중인 돼지 엄마(feat. 대치동)

엄마는 할 수 있다

2021년 11월 8일. 암과의 1일이 시작된 날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날이라 생각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 첫날은 나를 살린 날이 분명하다. 그날을 생일만큼 기념해서 축제를 열어야 할까도 고려 중이다.

2021년은 우리 딸이 고3, 아들이 중3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였다. 어느 한 해도 아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시기는 없지만 입시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중심 잡고 열정을 쏟아야 하는 시기임은 분명했다. 그런 시기에 엄마인 내가 암을 만난 것이다. 모성애 별로 없는 이기적인 엄마인 줄 알았지만 제일 먼저 아이들이 떠올랐다.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말해야 아이들이 덜 놀랄까?', '그냥 작은 혹 떼는 거라고 거짓말할까?' 결국 항암 때문에 속일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야 말았지만 잠시 거짓말도 생각했었다. 이 와중에 아이들의 학습에 지장을 주면 어떡할까를 걱정하는 것 보니 대한민국 엄마가 맞다. '언제 얘기할까?, 어디까지 얘기할까?'를 결정하는 것이 병원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고민이 되었다. 신랑과 상의 끝에 일단 아이들의 기말고사가 끝나면 얘기하기로 했다. 결국 기준점은 또 시험이다. 나 때문에 아이들이 흔들려서 혹여라도 그들의 인생을 설계하는데 선 하나라도 잘못 그려지는 것이 싫었다. 결국 기말고사를 모두 치른 어느 날 우리 가족 넷은 식탁에 앉았다.

"일단 놀라지 말고 들어.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어. 그런데 치료는 잘 될 것이니까 지나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부탁 하나만 할게.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흔들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엄마는 치료받는데 최선을 다할게. 알았지?"

최대한 덤덤한 말투로 사실 전달에 집중했지만 아이들은 눈물을 터트렸고 나는 참으려고 애썼지만 쉽지는 않았다.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오히려 얘기하고 나니 후련했다. 할 말을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렇게 난 고3, 중3이 된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씩씩하게 치료를 받았다.




나는 몇 년 동안 시쳇말로 돼지엄마였다.

딸은 중학교 때부터 특목고를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딸도 나도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내 차를 노란색으로 칠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라이딩하느라 바빴다. 본인이 목표를 가지고 하고 싶어 했으니 나는 서포터스가 되어야 했다. 재능 없는 열정은 서로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아이의 재능은 내 열정보다 앞서 있었다. 딸의 꿈을 향한 노력은 힘겨웠지만 원했던 특목고에 입학함으로 목표에 대한 추진력을 받는 듯 보였다. 돼지엄마는 본격적으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특목고 입학 후부터는 왕복 두 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하는 대치동 라이딩이 시작되었다. 남들이 할 때는 '굳이 저렇게까지?' '미친 거 아냐' 했었다. 내가 하니 미친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가끔, 미쳤지만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끔 하면서 결국 핸들 잡고 강남순환도로를 탄다. 아이 수업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학원 근처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했다. 강남은 대학 다닐 때 한두 번 친구 만나러 가본 것이 다였던 내가 딸 덕분에 강남에 있는 센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강남의 비싼 주차비용을 내느니 주차가능한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처음 간 대치동은 지금까지의 사교육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뉴스에서만 보았던 대치 사거리의 하원시간 교통혼잡 속에 나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라이딩 나온 부모들이 한데 엉켜 클랙슨을 울려대고 주변 교통정리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수신호와 캐리어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낯설고 슬픈 생각마저 들었다. 그 중심에 서서 '미친 사교육'을 외치며 거부하지 못하고 함께 떠다니고 있었다. 특목고 수업은 열린 강좌에 우리 아이가 수강신청을 하는 게 아니라 팀을 꾸려서 수업을 개설시키는 형태다. 팀모라는 이름의 대표엄마가 수업을 잡고 학원비를 걷어서 학원에 전달하는 특이한 방식이었다. 특이했지만 금세 적응했고 우습고 낯선 단어였던 팀모라는 타이틀은 나의 것이 되었다. 학원설명회에서 만난 엄마들과 팀을 만들다가 성질 급한 내가 덜컥 선택이 된 것이다. 이런 형태의 수업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면서도 불이익을 받거나 수강을 못 하게 될까 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업을 잡은 적도 있었다. 팀전체로 움직여야 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선택해서 수업을 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고 같은 팀 어머니들과의 미묘한 감정전도 자주 발생한다. 다른 팀에 밀리지 않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일타강사의 수업을 잘 잡아오는 유능한 팀모가 되어야 했다. 딸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팀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영향력 크지 않으면서 할 일만 많은 감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학부모 대표라는 또 하나의 감투를 맡게 되었다.

"1반 반장 어머니가 대표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모두가 낯선 상황에서 우리 아이가 1반 반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어머니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나온 제안이었다.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큰 사안 아닌 일에 서로 미루면서 실랑이하는 게 싫어서 그러자 했다. 그렇게 2학년까지 "1학년 때 하셨던 어머님이 이어서 해주시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에 또 한 번 수락했다. 2학년까지 학부모대표를 하다 그 이후 암환자가 되었고 딸은 고3이 되었다. 딸이 나에게 묻는다.

"엄마, 이번에는 반장선거 나가지 말까?"

반장인 아이의 엄마들 중에 학부모 대표를 한다는 것과 엄마가 한동안은 더 이상 학교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난 미안했다. 저런 질문을 하게 만든 상황이 미안했다.

"아냐, 하고 싶으면 해야지. 우리 딸이 반장 안 하면 누가 해"

나로 인해 가족 누구에게도 짐이 되거나 피해를 주면 안 될 일이다. 딸이 반장이 되어도 학부모 대표를 안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고 꼭 나가보라 했다. 딸은 그렇게 3년 동안 반장을 했고 난 다시 반장 엄마들 방에 소환되었다.

"2년 동안 하셨던 분이 쭉 하시면 어떨까요?" 학부모 대표를 계속해달라는 예상했던 부탁이었다. 개인사정이 있어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누군가 해주기를 읍소하며 사정했다. 항암 중이라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개인사정 때문이라는 나의 말은 그저 핑계처럼 들릴뿐. 아무도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할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내가 아닌 누구의 엄마로 살고 있는 그곳에서 가십거리가 될까 봐 겁이 났다. 결국 난 수군대는 소문의 불쌍한 주인공이 되기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하던 일을 이어하기로 결심했다. 대치동 학원 팀모도 내려놓지 못하고 학부모 대표도 그만두지 못했다. 항암 중에도 돼지엄마 노릇은 멈추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로나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 덕분에 모든 회의는 줌으로 이루어졌다. 항암 중에 나에게 코로나가 찾아올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엄마들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덕을 본 것이 맞다. 가발을 쓰고 회의에 참석하면 근거리에서 보는 것이 아니었기에 알아보지 못한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엄마들과 수없이 커피 마시는 자리에 나갔어야 할터인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항암주사를 맞으면서 학부모 건의사항을 취합하기도 하고 엄마들에게 공지사항을 작성해서 올리기도 했다. 진통제 먹어가면서 대치동 수업을 잡기 위해 학원마다 전화해 실장들과 통화하고 스케줄을 조정했다. 아픈 건 내 사정일 뿐이었다. 아이들 학원 시간표를 만들어 엄마들에게 공유하고 의견을 받아 수정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조금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가발 쓰고 대치동 라이딩을 가기도 했다. 이건 돼지엄마여서가 아니라 정말 엄마여서 가능했던 일이다. 다른 일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함부로 아파서도 안되고 아파도 강해야 한다.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네이버 지식백과 상에 돼지엄마는 교육열이 매우 높고 사교육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여 다른 엄마들을 이끄는 엄마를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일정 부분 맞기도 하고 과장되어 있는 면도 있긴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말이어서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난 그저 열심히 하려는 자식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고, 애쓰는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그때의 돼지엄마를 칭찬한다.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그날의 내 부탁을 들어준 가족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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