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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Apr 01. 2024

맘먹으니 못할 게 없네 2

10km 마라톤 도전

인천 국제 하프 마라톤 대회


암 환자라는 타이틀을 단 이후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보였던 것들도 다르게 보인다. 제23회라고 쓰여있는 걸 보니 벌써 이십 년 넘게 이어온 행사일 텐데 이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마라톤대회에 나가볼까?' 머리카락은 온전치 않지만 모자 쓰고 달리면 될 것이고 그냥 꽂혀서 무작정 하고 싶어졌다. 나 같은 초보를 위한 5km부터 10km, 하프까지 본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거리에 신청하면 된다. 걷는 건 그래도 한 시간이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 번도 달려볼까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체력적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 인간이다. 가만히 있어도 한계에 부딪혀서 허덕거리며 사는데 굳이 자발적으로 한계를 찾아 나설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러던 내가 자꾸 해보지 않았던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욕구가 샘솟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병원을 오가며 그냥 흘려보낸 시간과 누워서 약으로 버틴 세월이 아쉽고 억울해서 더 바쁘고 열심히 살려고 한다.


"자기야, 우리 마라톤 해볼래?" 뜬금없는 제안을 잘하니 신랑은 이제 뭐 놀라지 않는다. 그저 차분하게 객관화된 팩트를 얘기한다. "그거 쉽지 않아. 게다가 한 번도 안 해봤으면 더더욱" "누가 쉽다 그랬어? 해보자 그랬지." "맨날 안 된다는 말부터 해. 좀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면 안 돼?" 무시하지 말라며 괜한 심통을 부린다. 무거운 타이틀을 떠안고 사는 아내가 걱정돼서 나온 말이 남자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고 여자인 나의 해석에서 오류가 생긴 것쯤은 안다. 알면서도 서운한 게 또 내 마음이다. 그 심통을 풀게 하는 건 동의라는 것도 잘 아는 신랑은 함께 해보자고 태세를 전환했다. "그럼 일단 5킬로만 할까? 아냐. 10킬로 해보자." 그렇게 얼떨결에 현수막만 보고 10km 마라톤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풀코스도 아니고 하프도 아닌 10km였지만 각오는 42.195km와 다르지 않았다. 전문가가 보면 가벼운 코스길이겠지만 나에게 10킬로 마라톤은 엄청 긴 코스다. 일단 무언가를 시작하면 장비부터 구비해야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에 가볍고 예쁜 러닝화를 사고 매일 달리기 연습을 했다. 그냥 무작정 나갔다가 중간에 낙오되거나 시간 내 진입하지 못해 이송차량을 타고 들어오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일단 시작하면 열심히 하는 편이고 쪽 팔리는 건 못 참는 지랄 맞은 성격이 원하는 걸 이루어 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열심히는 하겠는데 혼자서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할지 알려줄 코치가 필요했다. 매일 나와 함께 달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찾은 코치가 'Runday'어플이다. 나의 마라톤 선생님은 어플 속 녹음된 성우의 목소리였다. 1분 뛰고 2분 걷기를 시작으로 8주를 연습하면 30분 뛰기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앱이다. 30초도 연속으로 뛰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었던 내가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에 맞춰 1분을 뛰고 있다. 1분을 뛰면 2분을 쉴 수 있다는 희망회로가 작동하면 1분을 참고 뛰게 된다. 그렇게 1주 차를 지나면 30초를 더 뛰게 만들고 점진적으로 뛰는 시간을 늘려간다. 힘들어서 지쳐갈 때쯤 귀에다 대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내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멋지게 달리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기계적으로 녹음된 소리지만 정말 나를 응원하는 말처럼 들려 무거운 다리를 더 들어 올려 긴 시간을 달릴 수 있게 된다. 시키는 대로만 따라 하니 연속 30분을 뛸 수 있게 되었다. 주 3회로 8주 동안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난 매일 연습해서 4주 만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속도에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뛰었다. 그러다 조금씩 뛰는 시간을 늘리고 속도도 높여나갔다. 목표가 있어서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Runday어플의 긍정적 가스라이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라톤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어플이다. 마라톤 참가신청을 할 때 작성해서 냈던 사이즈에 맞게 운동복이 도착했다. 찐한 하늘빛 상의와 검은색 하의. 신혼 초에 신랑이랑 세트로 맞춰서 같이 입는 거 좋아했는데 이제 중년이 되어 마라톤 복장 커플룩을 입게 되었다. 대회에 참가하기 전 10km를  뛰는 연습도 몇 번 하다 보니 최소한 낙오는 되지 않겠다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대회당일 아침. 3월이었지만 꽃샘추위가 있어 아직은 살짝 쌀쌀함이 느껴졌다. 레깅스 위에 반바지, 이너 위에 반팔티셔츠를 입고 체온 유지를 위해 바람막이도 하나 준비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나의 동지 1호에게도 같이 해보자 제안했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럴 줄 알았다. 1호는 운동에 자신감이 있는 친구였다. 신랑, 나의 동지 1호,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셋은 마라톤 스타트라인에 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방식으로 워밍업을 하고 있었고 처음 경험해 보는 색다른 광경에 기분 좋은 긴장감도 느꼈다.  출발 직전 나는 친구와 신랑에게 파이팅을 외쳤고 무엇보다 마음속으로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소리로 '완주해 보자.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응원해 주었다.


자! 준비! 출발!

"와!!!!!!" 사람들이 큰 소리를 외치며 스타트 라인을 통과한다. 난 그날도 이어폰을 끼고 Runday 어플 코치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경기에 임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한발 한발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달렸다. 1시간 30분 이내 완주해야 성공이다.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꼭 성공해서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다. 음. 뭐랄까. 일 년 전 암환자가 된 내가 일반인으로 다시 살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시험장 같은 느낌이랄까. 앞사람의 발을 보며 템포를 맞추기도 하고 주변풍경을 감상하면서 호흡을 고르며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달리는 중간에 마련된 물을 마시며 올림픽 경기에서 봤던 국가대표의 흉내도 살짝 내보면서 반환점을 향해 달렸다. 자동차 바퀴로만 밟았던 8차선 도로 위를 내 두 발로 달려가고 있다. 여지없이 등장한다. 울컥 씨!



 지하차도를 통과할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함성을 지른다. 나도 따라 그간의 고됨을 다 털어내는 맘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쳤다. 그 소리가 지하동굴에 울려 퍼져 제법 웅장한 소리로 변해 '애썼다' 하며 가슴에 '쿵' 부딪혔다. 감성에 오래 젖어있기엔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다시 페이스를 가다듬는다. 체력 좋은 나의 동지 1호와 신랑은 이미 한참 앞으로 나간 지 오래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의 페이스대로 달려 결승점으로 가고 있다. 느리지만 앞으로 가고 있고 다시 사람들 속에 섞여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힘은 들지만 행복하게 달렸다. 결승점이 보인다. 결승점 위에 커다란 시계를 보니 다행히 시간 내에 도착을 한 모양이다. 동지 1호와 신랑은 이미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승선 테이프가 있는 것처럼 나는 두 팔을 위로 크게 벌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통과한 결승점이고 순위에도 든 건 아니지만 이번 마라톤은 나에게 달리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동지 2호와 3호의 등장으로 눈물버튼이 눌려져서 결국 울어버렸다. '암을 이겨낸 친구! 마라톤 10km 완주' 이런 축하의 마음이었을까? 10km 마라톤 완주를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들고 결승점에 서있는 사랑스러운 주책바가지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10km 완주하고 부둥켜안고 울면서 꽃다발 들고 사진 찍는 우리들이 오버쟁이 아줌마들로 보였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또 하나를 해냈다.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고 계획대로 탈없이 해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하루가 그리웠던 나는 모든 것이 감사했다.


암! 네가 아니었다면 평생 안 했을지 모를 일을 덕분에 또 하나 해냈다. 그래도 여전히 네가 고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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